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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스타를 꿈꾸던 마돈나, 아트컬렉션에도 열정 바치다

이영란

 
좌) 마돈나, 우) 타마라 드 렘피카, Andromeda(부분), 1929. 마돈나 소장


우리에겐 야단스런 차림에, 자극적인 퍼포먼스로 각인돼 있는 가수 마돈나(1958- ). 전 세계를 누벼온 ‘팝의 여왕’이자, 3억장이 넘는 음반을 판매한 최고스타인 건 분명하지만, 종교·동성애·반전 등 민감한 주제를 다뤄 논란을 일으키는 데다, 스캔들도 끝없이 양산하니 고상함이나 진지함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지않을까 싶다.

그런데 그런 마돈나가 대단히 진지한 예술애호가요, 야심찬 미술품 컬렉터라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 연예계의 여느 스타들처럼 이런저런 돈 될만한 작품을 사 모으는 컬렉션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사실도 뜻밖이다.

30년 넘게 미술품을 수집해온 이 똑똑한 고수는 철저하게 맥락을 갖고 그림과 조각을 수집해왔다. 그것은 ‘인간 존재’를 다룬 작품을 컬렉션한다는 것이다. 때론 아름다운 풍경화라든가,세련된 추상화에 끌릴 법도 할 텐데 마돈나는 선택과 집중을 확실히 실천하고 있다. 

특히 새로운 여성성을 드러낸 작품이 주(主)축이다. 미국의 미술 전문매체 아트넷(Artnet)은 현재 마돈나의 아트컬렉션이 300여 점이 넘고, 금액상으로도 1억 달러(한화1,170억 원)를 상회한다고 전했다. 괄목할만한 규모다.

마돈나는 이탈리아계인 부친과 프랑스계인 모친 사이에서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5살 때 돌아가시면서 상당한 결핍을 느끼고 성장했다. 그래서 더욱 춤에 빠져들었고 무용쪽 재능이 뛰어었다. 머리도 명석해 고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미시간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칙칙한 공업 도시에서 끼를 누르며 젊음을 썩히고 싶지 않았다. 

결국, 대학을 중퇴하고, 달랑 35달러를 쥔 채 뉴욕 땅을 밟았다. 그녀는 던킨도너츠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댄스스쿨을 다녔다. 그러나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이 무렵 마돈나는 길거리에서 모르는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그 쓰라린 경험이 그녀를 전사(戰士)로 만들었고,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했다.

마돈나는 뉴욕의 낙서 화가였던 장-미셸 바스키아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또 앤디 워홀, 키스 해링과도 어울리며 예술적 안목을 키웠다. 바스키아는 분명 매력 넘치는 화가였지만 헤로인(약물) 과용 때문에 그와 자주 다퉜던 마돈나는 결국 이별을 통보했다. 

그러자 화가는 “내가 준 그림 돌려달라”고 했고, 그녀가 보는 앞에서 검은 물감으로 자신의 그림을 덮어버렸다. 광기로 점철된 요절화가와의 짧은 사랑은 그렇게 끝났다. 훗날 마돈나는 바스키아의 기법을 패러디해 앨범 재킷을 만들며 “그는 정말 뛰어난 천재였다. 그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마돈나는 바스키아, 해링을 잇는 ‘게릴라 화가’ 뱅크시와 JR의 작업을 특별히 좋아하게 됐다. “그들의 그림은 거리에서 누구나 만날 수 있다. 뱅크시, JR은 (잘난 척하는) 엘리트가 아니라 좋다”고 했다. 그녀의 지향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80년대 초부터 작품을 수집하던 마돈나가 본격적으로 컬렉션에 뛰어든 것은 1987년이다. 프랑스 화가 페르낭 레제의 회화 <두 대의 자전거>를 사들였다. 4명의 젊은 남녀가 등장한 이 그림에선 평범한 청춘들의 싱그런 에너지가 느껴진다. 

1990년에는 레제의 입체파적 면모가 드러난 <붉은 테이블과 3명의 여성>이란 그림도 수집했다. 20년 넘게 이 작품을 소장해온 그녀는 2013년, 아프가니스탄 소녀들의 교육에 써달라며 그림을 소더비에 건넸다. 작품은 720만 달러에 팔렸다.


프리다 칼로, 원숭이와 함께 한 자화상, 1940, 마돈나 소장

멕시코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1907-54)의 작품은 마돈나에게 특히 각별하다. 처음 프리다 칼로의 작품을 본 순간 얼어붙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작품이 화랑이나 경매에 나오면 지체없이 달려갔으며, 초상화들을 비롯해 여러 작품을 매입했다. 

열정적인 무대로 유명한 마돈나가 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의 우상이자 불굴의 투혼을 발휘하며 여성으로서의 자존감을 그려낸 칼로에 매료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칼로의 작품 중에서도 <나의 탄생>,<원숭이와 있는 자화상>, <뿌리>는 마돈나 컬렉션의 골갱이에 해당된다. 

여러 미술관이 칼로의 전시라든가, 인물화 기획전을 할 때 반드시 대여를 타진해오는 작품이다. 실제로 마돈나는 <나의탄생>과 <원숭이와 있는 자화상>을 2005년 런던 테이트모던에 빌려주기도 했다. 혼자 힘으로 아기를 출산 중인 여성을 그린 칼로의 <나의 탄생>은 막 태어난 어린 아기가 화가의 모습을 하고있다. 보는 이에 따라 엽기적으로 느낄 수도 있는 작품이다. 

마돈나는 “이 그림을 싫어하는 사람과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잘라 말하기도 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불행과 상처를 특별한 예술로 승화시킨 아티스트의 이미지가 마돈나에게 이입되면서, 마돈나는 기존의 ‘섹시 아이콘’을 넘어 ‘자기 세계가 분명한 스타’라는 이미지를 얻게 됐다. 그 때문일까? 마돈나는 아주 간절히, 영화 속 칼로 역을 맡고 싶어 했다. 셀마 헤이엑에게 배역이 넘어갔지만 말이다.

마돈나는 폴란드 출신의 타마라 드 렘피카(1898-1980)의 회화도 여러 점 수집했다. 스스로 “드 렘피카 작품은 뮤지엄을 해도 너끈할 정도”라고 밝혔듯 대작과 주요작을 두루 사들였다. 1930년대 파리 화단의 프리마돈나로 군림하며 관음증, 그룹섹스, 동성애 등 파격적인 테마를 다뤄 큰 파문을 일으켰고, 빼어난 미모로 남성편력을 구가했던 드 렘피카와 21세기의 마돈나는 사실 접점이 많다. 

드 렘피카 작품 속 강한 섹슈얼리티는 본능에 솔직하고, 얽매임 없는 존재이길 원하는 마돈나와 맞닿아 있다. 뜨거운 관능과 얼음 같은 차가움이 공존하는 그림 속 여성상 또한 마돈나가 늘 염원하는 이미지다. 그녀가 소장한 드 렘피카의 <Andromeda>(1929) 속 여인은 마돈나에 의해 차용돼 무대에 그대로 시현됐다. 작품도 수집하고, 이를 패러디해 콘서트도 열고, 음반도 디자인하니 일석삼조인 셈이다.

마돈나는 신디 셔먼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1997년 뉴욕 MoMA에서 열린 셔먼의 ‘Untitled Film Stills’전을 후원한 사람도 마돈나다. 셔먼은 1977년, 불과 스물셋의 나이로 미국 영화 속에 깃든 고루한 여성상을 해체해 퍼포먼스 작업을 펼쳤다. 

당시로선 대단히 획기적인 시도였던 것. 마돈나는 1992년 <SEX>라는 타이틀의 화보를 출간했는데 “나는 카멜레온처럼 변신하고 싶었다. 이는 물론 신디 셔먼을 참고한 거다” 고 밝혔다.

한편 마돈나는 만 레이의 1920-30년대 주요작들을 보유하고 있고, 피카소의 여인초상들도 소장 중이다. 특히 피카소의 <Buste de femme à la frange>(1938)는 2000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470만 달러에 낙찰받은 것으로, 현재 작품값이 6-7배를 상회할 것으로 평가된다. 이밖에 프랜시스 베이컨, 프란시스 피카비아, 살바도르 달리, 현대작가 중에는 트레이시 에민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다. 

모두 인간 또는 실존을 테마로 한 작업이다. 또한, 마릴린 민터의 도발적인 비디오 작품도 수집했고, 유명사진가들의 작품도 다수 소장 중이다. 마돈나는 시간 날 때마다 미술관과 화랑을 찾고 있다. 런던에 살 때는 수시로 전시를 보러 다녀 뉴스조차 되지 않았다. 또 각종 자선 경매나 이벤트도 자주 개최하고 있다.

디트로이트의 평범한 가정서 태어나 17살 때 열렬히 좋아하는 무용을 하고자 뉴욕으로 무작정 떠나온 마돈나는 “나는 내가 최고의 가수, 최고의 댄서가 아니란 걸 잘 안다. 하지만 그러므로 원하는 대로 도발할 수 있다. 나의 목표는 (쓸데없는) 금기를 깨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의 아트컬렉션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에 대한 연민이 담긴 작품, 그러면서도 기존의 관습과 도덕,금기를 사정없이 깨부순 작업에 무한대의 애정을 보내며, 이 끈질긴 스타는 오늘도 아트월드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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