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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미술에 깜깜 절벽이던 보고타의 직물상 머그라비, 워홀 회화 800점 보유한 세계 최대 ‘워홀 팬’ 되다

이영란

“앤디 워홀(1928-87)의 전시를 열고 싶거나, 작품을 사고 싶은가? 그러면 맨해튼의 머그라비(MUGRABI) 패밀리와 접촉하라.” 뉴욕 미술계에서 금언처럼 통하는 말이다. 워홀의 작품을 800여 점이나 보유하고 있는 머그라비 패밀리는 이 부문에 있어 단연 세계 최대규모다. 물론 질에서도 최고 수준이다.


워홀이 세상을 뜬 후, 피츠버그에 설립된 앤디워홀재단은 지난 2012년, 남은 회화, 판화, 사진 등 2만여 점(1억 달러 추정)을 크리스티 경매에 모두 넘겼다. 소장품을 전부 처분해 ‘시각예술 지원사업에만 집중하겠다’고 선언한 것. 이에 따라 머그라비의 워홀컬렉션은 더욱 독보적이게됐다. 그렇다면 콜롬비아에서 온 사업가 머그라비는 어떻게 그 많은 워홀 작품을 손에 넣게 된 것일까? 그 흥미로운 스토리를 살펴보자.


호세 머그라비와 두 아들(왼쪽부터 알베르토 머그라비, 데이비드 머그라비, 호세 머그라비)


시리아계 유대인인 호세 머그라비(77)는 식료품상의 7남매 중 장남으로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우리로 치면 남대문시장에 해당되는 예루살렘의 ‘Shuk’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16살 때 콜롬비아의 삼촌에게 보내진다. 보고타에서 직물업을 하던 삼촌 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일을 배운 그는 이후 콜롬비아에서 가장 큰 직물상이 된다. 하지만 이탈리아를 여행한 뒤 ‘직물만으론 부가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1982년 미국으로 이주한다. 아내와두 아들을 이끌고 뉴욕에 둥지를 튼 그는 의류수입업을 전개해 꽤 큰 부를 축적했다. 그런 머그라비가 컬렉터가 된 것은 혈기왕성한 제프리 다이치(64)때문이었다.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을 졸업하고, 씨티은행에서 아트어드바이저로 일하던 다이치는 머그라비를 설득해 르누아르의 풍경화를 사게 했다.1982년이었고, 그림값은 불과 12만 달러였다. 다이치는 “지금이 인상파를 살 때”라며 사업가를 독려해 피사로, 시슬리의 회화도 수집하게 했다.그러다가 이듬해인 1983년,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처음 접한 사업가는 그야말로 심쿵(?)했다. 인상파가 아닌 현대미술에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긴 그는 1988년 270만 달러를 내고 로스코의 그림을 낙찰받았다. 이는 현대미술 경매사상 최고가여서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1987년에는 스위스 아트바젤에서 앤디 워홀의 연작을 주저 없이 사들였다. 독일화랑 부스에 걸린 워홀의 <최후의 만찬> 시리즈 4점을 점당 3만 7,000달러에 매입한 것. 그리곤 이듬해 런던 필립스경매에서 점당 10만 3,350달러에 되팔아 큰 수익을 올렸다. 머그라비는 “스위스 아트페어에서 워홀의 그림을 본 순간,‘아 저거다. 더할 나위 없이 미국적이구나’하고 전율이 일었다. 미술사 근처에도 안가봤지만 워홀이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임을 간파할 수 있었다. 그 후로 워홀 그림이 나왔다 하면 달려가 손에 넣었다”고 밝혔다. 당시만 해도 워홀 작품은 (미국 팝아트를 대표하긴 해도) 실크스크린으로 무수히 찍어내 가치가 작고, 진위문제도 걸림돌이어서 머그라비처럼 무작정 달려드는 컬렉터가 많지 않았다.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작품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특히 주가급락으로 세계 금융계가 요동치며 그림값이 곤두박질 치던 1980년대 말, 스위스 비숍버거화랑으로부터 38점을 500만 달러에 매입한 게 결정적이었다. 호세 머그라비는 이 무렵 장 미셸 바스키아, 이브 클라인 등의 작품도 매입했다. 신혼 초 아내가 그림 이야기를 꺼내면 “그림이 뭔 대수냐?”며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직물상은 미국으로 이주한 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열혈 수집가’가 된 것이다. 미술공부를 한 적이 없던 그는 이브 클라인의 푸른빛 조각을 사놓고도 “이브 클라인이 누구냐?”고 되물어부인과 두 아들을 실소케 하기도 했다. 이런 주위 반응에도 “그래 맞다. 난 따로 공부를 못해 직관으로 살 뿐이다. 그런데 성공률이 높지 않더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앤디 워홀, self Portrait



호세 머그라비는 초기에 수집했던 인상파 작품을 상당 부분 처분하고, 워홀, 바스키아, 톰웨슬만으로 컬렉션을 집중했다. 가장 미국적인 ‘팝아트 3인방’에 올인하며 컬렉션의 기조를 좁힌 것. 


반면에 14, 15살 무렵부터 아버지와 함께 소더비, 크리스티경매를 다니며 작품의 거래현장을 무수히 목도한 두 아들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컬렉션을 시행하고 있다. 사교적이면서 다혈질인 큰아들 알베르토 머그라비(45)는 데미언 허스트를 집중적으로 밀고 있다. 요란한 작가의 별스런 작품을 어떻게든 멋지게 보이도록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면서, 가격을 끌어올리는 역할도 수행 중이다. 반면에 경영컨설팅업체에 근무하며 엘리트코스를 밟은 동생 데이비드 머그라비(44)는 차분한 성격답게 보다 치밀하다. 특정 작가를 밀기 보다, 집안의 아트비즈니스가 매끄럽고 효율적으로 굴러가도록 조정 및 전략업무를 맡고 있다.


수집품이 늘어나자 머그라비 패밀리는 뉴욕 상류사회에서 컬렉터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사들처럼 ‘마스터피스’로 불리는 작품을 보유하기 위해 보다 큰 베팅에 나섰다. 걸작 또는 핵심적 작품만 취급하는 소더비, 크리스티의 이브닝세일을 활발히 누비던 패밀리는 1988년 뉴욕 소더비 이브닝세일에서 워홀의 걸작인 <Twenty Marilyns>을 396만 달러에 낙찰받았다. 이는 추정가의 2배가 넘는 가격이자, 역대 워홀의 작품 낙찰가 중 최고가였다. 최근 머그라비측이 <Twenty Marilyns>을 비롯해 워홀 작품몇 점을 UAE에 일괄 5억 달러로 팔려 했던 사실이 전해졌다. 성사 여부에 대해선 양측이 함구하고 있지만, 아부다비에 뮤지엄이 개관하면 드러날 것이다.


앤디 워홀, Twenty Marilyns


머그라비 패밀리는 앤디 워홀의 작품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갖가지 전략을 구사한다. 작품의 수급을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것은 물론, 매년 가격을 끌어올리기 위해 주도면밀한 작전을 수행 중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재키> 시리즈다. 머그라비측은 워홀의 <재키> 연작이 <마릴린>이나 <자화상>에 비해 가격이 낮게 형성됐다고 보고, 작품을 시장에서 집중적으로 매집했다. 그리곤 수년 후 경매에 <재키>를 맛보기로 내놓아, 기존가격의 2배로 훌쩍 올려놓았다. 이는 공정거래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되었고, 머그라비 패밀리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시장을 교란한다는 비난이 커졌다.

실탄(돈)을 엄청나게 갖고 있거나, 누구나 탐내는 작품을 가진 ‘강자’만이 살아남는 게 작금의 미술시장이니 어쩔 수 없다 해도, 미술품을 세기의 문화유산이 아닌, ‘투자를 위한 재화’로만 보는 태도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머그라비는 워홀 뿐 아니라 바스키아, 데미안 허스트 작품값도 같은 방식으로 조정한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이에 따라 경매에서 특정작가 작품을 비싼 값에 사들여 작가의 전체 작품값을 올려놓는 것을 ‘머그라비 효과’라 부를 정도다. 이에 대해 알렉산더 머그라비는 “아버지는 워홀과 바스키아의 작품값이 싸든, 비싸든 그들 작품을 진심으로 좋아한다. 워홀의<Twenty Marilyns>을 엄청난 경합 끝에 낙찰받았을 때 “온 미국을 다 얻은 것 같다”며 기뻐하셨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런 귀한 작품을 이 시대에 가질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다. 개인컬렉션의 향방에 대해 미리 단정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반박하고 있다.


수년 전부터 머그라비 패밀리는 “우리는 갤러리를 운영하지 않는다. 작가 또한 보유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마켓 메이커’일 뿐”이라며 자신들의 지향점을 밝혀왔다. 자본주의 구조에서 자신들과 같은 컬렉터도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머그라비의 뒤를 쫓는 영리한 투자자들이 지나치게 많이 출몰하고 있어 문제다. 이들은 그림을 마치 금융상품 다루듯 하고 있다.


아무리 다양성이 21세기 주요 덕목이라 해도, 염불보다는 잿밥에 목을 매는 컬렉터들이 도처에서 양산된다면 현대미술의 건강한 성장은 공염불이 되고 말 것이다. ‘아트재테크는 저금리시대에 금융상품보다 훨씬 더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다’며 오로지 투자에만 골몰할 경우보다 혁신적이고, 전위적인 작품들은 설 자리를 잃을 테니 말이다.

미술품은 돈이기에 앞서, 시대와 사회를 비추고 비판하는 거울이자 문화예술의 단단한 축이 되어야 한다. 때문에 머그라비케이스는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래저래 이 패밀리는 연구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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