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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텍사스 석유재벌의 메닐 모녀, 휴스턴과 뉴욕에서 공공컬렉션의 전범(典範)을 만들다

이영란

미술이 좋아 그 매혹의 세계에 푹 빠져 지내다가, 미술관을 만든 이들은 많다. 이 땅에서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하물며 부자들의 사회공헌이 불문율인 미국에선 말 할 것도 없다.

하지만 재벌가 모녀가 제각각 미술관을 건립한 예는 흔치 않다. 서로 힘을 합쳐 하나의 미술관을 만든 게 아니라, 확연히 다른 성격의 미술관들을 설립한 모녀가 있으니 텍사스 석유재벌 슐룸베르거 가(家)의 딸과 외손녀다. 미국 최고의 유전개발업자 콘래드 슐룸베르거의 딸로 태어나 메닐(MENIL)가 남성과 결혼한 도미니크 드 메닐(1908-97), 그리고 그녀의 딸 필리파 드 메닐(1947- ). 이들은 각각 휴스턴과 뉴욕에 멋진 뮤지엄을 만들었다.


도미니크&존 드 메닐, 1967년 경


먼저 어머니 도미니크는 텍사스 휴스턴에 ‘메닐컬렉션’을 건립했다. 또 인근에 로스코채플, 사이톰블리갤러리, 비잔틴프레스코채플, 댄플래빈전시관을 25년에 걸쳐 조성했다. 메닐측은 이를 합쳐 ‘메닐캠퍼스’(총 3만 6천평)라 부르며, 관람객들은 재단이 만든 지도를 들고 7개의 포인트를 순례하면 된다.

도미니크의 아버지인 콘래드 슐룸베르거는 1926년 미국 텍사스에서 유전개발회사 ‘(주)슐룸베르거’를 창업해 세계 최대의 석유재벌로 키운 사람이다.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는 1936년 러시아에 출장을 다녀오다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부친의 타계 후 도미니크는 미술과 명상에 깊이 빠져들었다. 

석유왕국의 상속녀였지만 진보적 의식을 지녔던 그녀는 흑백차별 해소, 빈민구제에 힘을 쏟았다. 이는 남편 존 드 메닐 때문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어렵게 자랐던 존은 상류층에 편입된 뒤에도 마틴 루터 킹 목사 등 흑인지도자와 진보 정치인을 후원했다. 1968년 킹 목사가 피살되자 부부는 ‘진정한 평안을 찾는 명상 공간’을 조성하기로 하고 색면추상화가 마크 로스코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로스코는 검은 보랏빛의 장엄한 대작 14점으로 화답했다. 부부는 창문이 하나도 없는(천정으로만 빛이 들어온다) 8각의 특별한 건축물을 지었고, ‘로스코채플’로 명명했다.

로스코채플 바로 옆에는 바넷 뉴먼의 높이 7.2m짜리 조각 <부러진 오벨리스크>가 설치됐다. 대단히 보수적인 휴스턴으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각이 들어서고, 초교파적 예배당에선 달라이 라마 강연 등이 열리자 시민들은 “이 커플, 공산주의 아니냐?”고 힐난했다. 지식인 부호의 ‘시대를 앞선 행보’를 수용하지 못했던 것.

불의에 강하게 맞서는 남편과 달리 도미니크는 매우 내성적이었지만 의식은 남편못지않게 혁신적이었다. 당시로선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첨단건축과 큐비즘, 초현실주의, 추상미술, 개념미술을 적극 수용하며 그 선봉에 선 작가들을 후원했다. 아울러 원시적 생명력으로 가득 찬 아프리카 조각과 그로부터 영감을 받은 작품들을 수집했다.

도미니크 부부는 30년이란 시간이 흘러 수집품이 1만여 점을 넘어서자 1970년 뮤지엄 건립에 나섰다. 사람들과 함께 미술품을 음미하고 싶었던 것. 하지만 아쉽게도 존이 1973년 타계하는 바람에 건립이 미뤄졌고, 1987년에야 문을 열었다. 렌조 피아노가 디자인한 반듯한 미술관이 완공되자 주위에선 수집품이 1만 7천 점에 이르고, 그 수준 또한 높으니 ‘메닐뮤지엄’이라 명명하길 권했다. 

그러나 도미니크는 “뮤지엄 명칭을 달기엔 프로필이 부족하다. 개인의 사적 컬렉션 수준”이라며 끝내 고사했다. 수집의 방향과 철학이 또렷하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 그러나 메닐의 컬렉션은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그 내용이 정갈하고 품격이 있다. 수집품의 통일성은 부족할지 몰라도 작품 하나하나의 완결성은 대단하다. 상징주의 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오딜롱 르동의 검은 그림 <The Vegetal Eye(1885)>는 식물에 사람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대입된, 기묘하면서도 신비로운 걸작이다. 초현실주의 작가 르네 마그리트의 <골콩드(일명 겨울비)>는 설명이 필요없는 작품이고, 조르조 데 키리코, 이브 탕기, 살바도르 달리, 프란시스 피카비아, 막스 에른스트, 파블로 피카소, 피에트 몬드리안의 작품도 주인을 닮아(목소리가 크진 않아도) 무척 사랑스럽고 매혹적이다. 또 뮤지엄 주변에는 마이클 하이저의 대지미술 ‘균열’을 비롯해 놓쳐선 안 될 작품들이 포진해 있다.


필리파 드 메닐

메닐컬렉션이 이렇듯 차분히 미술의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면 막내딸인 필리파 드 메닐이 설립한 ‘Dia첼시’, ‘Dia비콘’은 그 성격이 천양지차다. 어머니를 꼭 빼닮아 수려한 외모에, 과묵한 필리파는 독일 출신의 비범한 아트딜러이자 수집가인 하이너 프리드리히를 만나면서 인생항로가 바뀌었다. 각기 재혼이었던 두 사람은 정서적 코드가 썩 잘 맞았다. 프리드리히는 뮌헨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다가 뉴욕으로 본거지를 옮겼는데, 이 세상에서 한 번도 시도되지 않은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게 목표였다. 필리파 또한 모험적, 전복적 성향이 강해 둘은 1974년 Dia예술재단을 설립했다. 그리스어로 ‘Through’라는 뜻의 ‘Dia’를 택한 것은 남편이었는데, 어느 한 곳에 고정되지 않고 끝없이 변주되는 현대미술과 잘 들어맞는다.

남편의 영향으로 금욕과 명상을 중시하는 이슬람의 신비주의 교파 수피교로 개종한 필리파는 “나는 현대미술에 끌린다. 그러나 작품을 수집하고 싶진 않다. 큰 규모나 성격 때문에 이뤄지지 못했던 아티스트들의 아이디어를 구현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비롯된 프로젝트들은 하나같이 “저런 것도 예술인가?”라고 질문하게 한다. 뉴멕시코의 광활한 들판에 7m 높이의 금속봉 400개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설치한 월터 드 마리아의 <번개 치는 들판>이 좋은 예로, 지금도 Dia의 프로젝트는 지구촌 곳곳에 남아있다.


두 사람은 1987년 맨해튼 22번가에 ‘Dia아트센터’라는 간판을 내걸고, 의미심장한 전시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곳은 훗날 ‘Dia첼시’로 명명됐는데, 2004년까지 첼시 지역의 혁신적 예술 메카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Dia는 특별한 역량을 지닌 작가들의 작업을 1년여씩 소개했다. 로버트 라이먼, 제니 홀저, 온 카와라, 피에르 위그, 프레드 샌드백, 다이애나 세이터, 로버트 고버 등이 이곳을 거쳐 갔고 6만여 명이 관람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재정난을 겪던 재단은 2004년 이 공간을 없앴다.

많은 이들이 아쉬워했음은 물론이다. 현재 Dia첼시는 옛 건물 맞은 편에 다시 둥지를 틀었다. 아끼던 맨해튼 공간을 매각하는 대신, 재단이 주목한 곳은 맨해튼 북쪽의 비콘이었다. 뉴욕에서 기차를 타고 허드슨강을 1시간쯤 달리다 보면 1929년에 지어진 나비스코(Nabisco)의 옛 박스프린팅 공장이 보인다. Dia재단은 2만 3,100㎡(7천여 평)에 달하는 이 낡은 공장을 각 작품에 맞는 공간으로 재구축해 2003년 ‘Dia:Beacon, Riggio Galleries’란 이름으로 개관했다. 세계 최대의 서점 반스앤노블의 레너드 리지오 회장이 3,500만 달러를 기부해 그의 이름을 붙인 것.


조르조 데 키리코, Metaphysical Interior with Biscuits, 1916, 휴스턴 메닐컬렉션



마이클 하이저, North, East, South, West, 1967-2002, Dia비콘 영구설치


Dia비콘의 여러 전시관 중 가장 압도적인 곳은 시뻘겋게 녹슨 철판작품이 들어선 리차드 세라의 갤러리다. 세라는 어마어마하게 크고 두꺼운 유조선용 철판을, 종이 말듯 둥그렇게 구부려 높다란 장막을 세웠다. 철판 사이를 빙빙 돌며 거닐다 보면 도대체 이런 작가는 현대예술의 어디쯤 위치시켜야 할까 생각해보게 된다. 마이클 하이저의 거대한 금속구덩이 작품인 <북, 동, 남, 서> 또한 Dia비콘이 아니면 접하기 힘든 낯선 작업이다. 

필리파 부부가 앤디 워홀 생전에 수집한 총 102점의 <그림자(Shadows)>연작을 비롯해, 존 체임벌린, 도날드 저드, 댄 플래빈, 요셉 보이스, 아그네스 마틴, 브루스 나우만, 솔 르윗, 로버트 스미슨의 갤러리도 비콘에 조성돼 있다.

싹수가 보이는 작가를 발굴해, 스타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놀라운 무대’를 만들어줬던 Dia의 필리파는 이제 은둔의 길로 들어섰다. 워낙 사람들 앞에 나서길 싫어했던 그녀는 수피교의 가르침처럼 ‘나를 찾는 여정’에 깊이 빠져든 듯하다. 이름까지 개명한 그녀를 아트월드에서 다시 보기란 힘들 것 같다. 그 대신 테이트모던 출신의 제시카 모건 관장이 활동을 개시했다. 

모건은 삼성미술관리움의 홍라희 관장 등을 재단 이사진에 새로 등용하는 등 Dia의 옛 영화를 되찾기 위해 총력체제에 돌입했다. 뉴욕미술계에 의미심장하면서도 빛나는 ‘결’을 만들었던 필리파의 Dia가 다시 멋지게 부활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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