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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다섯 살 때 사탕을 팔던 월마트 상속녀 앨리스 월튼, 미국 남부에 1조 원짜리 매머드급 미술관 만들다

이영란


앨리스 월튼과 뮤지엄

  

아셔 브라운 듀란, Kindred Sprits, 1849

한국에선 비록 7년 만에 철수했지만, 미국의 ‘월마트(Walmart)’는 세계에서 가장 큰 유통업체다. 전 세계 28개국에 11,000여 개의 할인점을 두고, 연간 4,80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따라서 이 월마트의 창업주 샘 월튼의 외동딸인 앨리스 월튼은 최상위슈퍼리치다.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올 3월 앨리스 월튼이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여성(331억 달러, 한화 약 38조 원)이라고 전했다. 화장품기업 로레알의 상속녀 릴리안 베탕쿠르가 여성부호 1위(375억 달러)지만, 재산에 가족분이 포함돼 있어 진짜 1위는 월튼이라는 것. 이 ‘여성 최고 부자’가 2011년 미국 아칸소주 벤톤빌에 ‘크리스탈브릿지뮤지엄(Crystal Bridges Museum of American Art)’을 건립해 화제였다. 총 12억 달러(1조 3천760억 원)가 투입된 이 거대한 미술관은 남부 소도시를 확 바꿔놓았다. 인구 2만 8천 명인 벤톤빌은 미술관 개관 후 매년 50만 명의 관람객이 모여들며 활기를 띠고 있다.

벤톤빌은 월마트가 처음 탄생한 곳이자, 월마트의 본부가 있는 곳이다. ‘소매업의 귀재’ 샘 월튼은 1962년 벤톤빌에 ‘월마트’라는 간판을 내걸고 생필품을 팔았다. 바로 그곳에 2세들은 월드클래스의 미술관을 만들었다. 시냇물이 흐르는 120에이커(15만 평)의 너른 부지에는 8개의 전시실과 도서관, 공연장, 교육공간, 조각공원, 아트트레일이 들어섰다.

월튼가를 대표해 뮤지엄 건립을 도맡았던 앨리스 월튼은 어린시절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3남 1녀 중 막내였던 그녀는 어머니와 종종 야외 사생을 했으며, 10살 때 처음으로 그림을 샀다. “내 생애 첫 작품은 피카소의 <Blue Nude>였다. 헌데 그건 리프로덕션, 말하자면 인쇄물이었다. 그 시절 주당 25센트였던 용돈을 아껴 피카소를 샀다. 아버지가 처음 차린 벤 프랭클린(Ben Franklin)이란 소매점에서였는데, 2달러쯤 했다” 그녀의 회고다.

워낙 부지런하고 검소했던 아버지는 자식들도 자기 용돈은 자기가 벌도록 했다. 앨리스 역시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가게에서 사탕을 팔았다. 이후엔 아이스크림 코너를 맡았다. 자식들은 그러면서 밤낮없이 열정적으로 일하는 아버지의 면면을, 고객을 성심성의껏 응대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녀는 “월마트가 미국 최대 유통기업이 된 후에도 아버지는 이코노미석을 이용하고, 허름한 호텔에 묵으셨다. ‘내가 1달러를 허투루 쓰면, 고객에게 1달러를 짐 지우는 일’이라 하셨다”고 회고했다.

자신에게 더없이 엄격했던 부친을 둔 탓일까? 그녀 역시 ‘세계 1위 여성부호’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수하다. 『뉴요커』지의 레베카 미드는 “앨리스는 뉴욕 파크애비뉴의 귀부인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반백의 머리는 언제나 질끈 동여매져 있고, 목장에서 말과 씨름해선지 피부는 늘 구릿빛이다. 쇼핑엔 당최 관심이 없는 듯하다”고 평했다.

그녀는 텍사스 샌 안토니오의 트리니티대에서 경제학과 회계학을 전공했다. 첫 직장은 상거래 회사였고, 이후 투자은행 등에서 일했다. 아칸소 노스웨스트공항 조성사업을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24살, 27살 때 결혼했지만, 바로 이혼했다. 이런 딸을 두고 아버지는 “앨리스는 나와 가장 많이 닮았다. 거친 야생마다”라고 했다. 20대 때 재미삼아 미국 화가들의 수채화를 사모았던 그녀는 40대부터 본격적인 컬렉션을 시작했다. 신중하게 작품을 사서 목장에 딸린 집에 걸었다. 대다수의 슈퍼리치들이 최신 트렌드를 쫓으며 유명작가 작품을 사는 것과 달리, 미국의 대자연과 시대상이 드러난 작품에 매료되곤 했다.

이렇게 작품이 하나둘 모이자 앨리스 월튼은 1999년 오빠들에게 “미술관을 짓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오빠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경쟁업체보다 단 10센트라도 상품을 싸게 팔아, 고객의 가계지출을 줄여주는 게 당면과제인 할인점과 고가 작품이 즐비한 미술관은 도무지 합치되지 않는다는게 이유였다. 월마트 내외부에서도 ‘막대한 돈을 들여 미술관을 짓느니, 직원 및 협력업체에나 잘해주지….’라는 비판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오랜 설득 끝에 합의를 이끌어냈고, 이후 미술관의 골갱이가 될 작품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미술사가와 전문가를 자문으로 위촉하고, 체계적인 작품수집에 나섰다. 월튼은 ‘미국의 예술과 예술가들에게 헌정하되,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미술관을 만든다’는 목표 아래 작품을 사들였다.

컬렉션은 미국 400년 역사를 예술을 통해 조망할 수 있도록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물화와 풍경화를 필두로, 식민시대와 개척시대를 거쳐 근대와 현대까지 다양한 작품이 망라됐다. 길버트 스튜어트의 <조지 워싱턴(1797)>, 벤자민 웨스트의 <큐피트와 프쉬케(1808)>, 프란시스 가이의 <브룩클린의 겨울풍경(1817)>, 메리 카사트의 <독서하는 여인(1877)> 등 쉽게 접하기 어려운 18-19세기 걸작들이 월마트의 품에 안겼다.


길버트 스튜어트, 조지 워싱턴, 1797

앨리스 월튼은 “다년간 미국작가들의 그림을 음미하면서 미국 역사에 매료됐다. 예술이 이렇듯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에 놀랐다. 그래서 미국의 혼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미술관을 세우고 싶어졌다”고 밝혔다. 2004년 12월 뉴욕 소더비서 열린 ‘프라드(Fraad) 부부 소장품 경매’는 그런 그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평생에 걸쳐 19-20세기 미국미술을 수집했던 부부의 유산 78점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경매에서 윈슬러 호머의 <Sping> 등 수작 여러 점을 매입했다. 그런데 경매가 이뤄지던 날, 그녀는 텍사스에서 열린 미국 Cutting Horse협회 대회에 출전 중이었다. 오전, 오후 연달아 열린 예선, 준결승에 참가했는데, 짬짬이 전화로 경매응찰가를 알려야 했다. “그날은 정말이지 아슬아슬, 피 말리는 날이었다'는 월튼은 2,000만 달러어치의 작품을 샀고, 준결승도 통과했다.

이듬해에는 3,500만 달러를 들여 아셔 브라운 듀란의 <Kindred Sprits(1849)>을 수집했다. 뉴욕도서관이 보유해왔던 이 그림은 듀란이 화가, 시인인 친구들을 모델로 세워 미 동부의 대자연을 표현한 걸작이다. 청명한 공기가 감도는 계곡을 섬세하면서도 절묘하게 그려 19세기 미국풍경화 중 최고로 꼽힌다. 이 작품을 월마트 상속녀가 산 것이 알려지자 미술계가 들고 일어났다. 싸구려 중국산 제품을 왕창 들여다 파는 바람에, 동네소매점을 고사시키는 ‘저속한 월마트’에게 이처럼 고귀한 그림을 넘기는 건 작품을 파괴하는 행위라는 것.

또 필라델피아의 토마스제퍼슨대학으로부터 토마스 에이킨스의 <The Gross Clinic(1875)>을 매입했을 때도 비판이 들끓었다. ‘필라델피아의 보물이 엉뚱한 곳(남부)으로 가게 됐다’며 성토가 이어졌다. 비평가들은 미술품이 거대자본가의 품으로 들어가는 걸 경계했다. 더구나 앨리스 월튼은 잦은 자동차사고로 약물복용 의혹을 받고 있던 터였다. 1983년 차를 멕시코계곡에 박는 바람에 다리뼈가 산산조각이 났고, 십여 차례나 수술대에 올랐다. 1989년에는 중년여성을 사망케 하는 사고를, 1998년에는 주유소를 들이받았다. 2011년에는 취한 상태에서 운전하다 체포됐는데 기소되지는 않아 “금수저는 법망도 피해간다”는 말이 나왔다. 

그런 그녀가 미술관을 만든다고 하자 ‘이미지 세탁이다’라는 지적이 나돌았지만 월튼은 당당했다. “뮤지엄이 개관하면 우리를 이해하게 될 것”이라며 맞섰다. 미국의 시대상을 반영한 주요작을 한데 모음으로써 체계적인 연구와 전시, 예술교육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 월튼은 현대미술도 여럿 컬렉션했다. 에드워드 호퍼의 <블랙웰아일랜드>, 재스퍼 존스의 <알파벳>을 사들였다. 마크 디 수베로, 키스 해링, 루이스 부르주아, 로니 혼의 조각과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캔디프로젝트, 제니 홀저의 대형 공간작업, 록시 페인의 높이 15m의 조형물도 낙점했다. 제임스 터렐의 빛 작업을 감상하는 파빌리온도 곁들였다. 

프린스턴대의 존 윌머딩 교수는 “그녀는 자신이 가야 할 방향과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냉철함이 돋보인다”고 평했다. 컬렉션이 600여 점을 넘어서자 월튼은 모쉐 샤프디에게 건축을 의뢰했다. 샤프디는 연못을 중심으로 6,000평의 미술관 건물이 다리로 연결되도록 했다. 조각공원, 아트트레일(Art Trail)도 설계했다.

월튼가 형제들은 미술관 건립을 위해 12억 달러를 쾌척했고, 앞으로 8억 달러를 더 내놓을 계획이다. 이는 유례가 없는 규모다. 앨리스 월튼은 크리스탈브릿지뮤지엄의 연착륙에 힘입어, 아칸소의 옛 치즈 공장을 혁신적인 현대미술센터로 바꾸는 작업에 착수했다. 유망작가들이 연구 토론하며 작업도 하는 예술발신기지를 만들겠다는 복안인데, 야심만만한 싱글상속녀의 도전은 이래저래 끝이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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