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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최덕휴, 불같은 성미는 어느 누구도 못 말려요

김정



인시아코리아가 국내 최초 설립되던 당시 문서



1990년 8월 30일 오전 10시, 최덕휴 교수님에게서 급히 와달라는 전화를 받고 사당동에 갔다. 


“어디 편찮으세요?” 

“요즘 왼쪽 눈이 안 보여, 여기 상자 좀 열어보소” 

그 상자엔 INSEA-Korea(국제미술교육협회 한국위원회) 서류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네가 내 후계자로 맡아 줄 수밖에 없네.” 

정말 당혹스러웠다. 


“교수님 주변에 많은 분이 있는데, 이건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죄송하오나 전 못합니다” 

“일단 내 말 좀 들어봐, 자네만큼 미술연구논문 쓴 교수가 없잖아. 이건 국제적이요, 나도 숱한 사람을 끌어주고 밀어줬지만 늘 허망해. 내 마지막 부탁이니 좀 해보게….” “교수님 심정은 이해되지만 부회장이 맡을 일입니다” “여보 김 교수 이건 인간적 부탁이야….” 

“절 생각해주신 건 감사하오나 정말 못합니다” 


더는 앉아있기가 불편해 자리를 뜨려 하자, 고성이 터졌다. 


“야. 김정! 나한테 이럴 수 있나? 다른 사람이 있다면 왜 자네한테 통사정하겠나, 솔직히 국내 교수들 제대로 미술연구 논문 한 편 쓴 사람 있느냐 이 말이야? 나도 이 짓이 좋아서 한 게 아니야. 5,60년대 한국미술교육현장을 보면 너무도 황폐해. 미술선생이나 교수는 학생들 정서와 창의성 교육엔 관심들이 없어. 내가 그걸 깨려고 연구모임 설립해 국제학생미술교류전도 추진한 게 아닌가…. 자네도 알다시피 난 지금 늙어 눈도 안 보이고 그러니 두말하지 말고 자네가 맡아야 내가 맘을 놔요! 자네가 몇 년 전 한국조형교육학회 창립한 건 정말 역사에 남을 아무나 할 수 없듯 이것도 자네만이 할 수밖에 없네. 나 최덕휴 자존심 버리고 통사정하겠네. 경희대에서 자네와 사제지간 만난 건 정말 행운이지, 이런 속 깊은 의논도 할 수 있으니 말이야.” 즉답 못 하고 교수님 얼굴을 보니 눈과 입이 일그러진 모습이었다. 만약 다시 거절하면 흥분, 졸도하실 예감이었다. 그순간 인간적 갈등 속에 말없이 상자를 들고 나오면서 후계 인수 뒤 즉시 해체를 결심했다.


그 후 내가 겪은 2년 고통 세월은 끔찍한 암흑이었다. 문교부에 제출되어야 했으나 처리되지 못한 30년 치 서류가 쌓여 있었다. 문제는 국고보조금 수령 후 사용내역서도 없는데 어떻게 내용증명서를 만들 것인가, 국고 돈을 쓴 증빙서류는 법적 문제다. 30년 동안 회의 기록이 없는데 어떻게 꾸며 만드는가, 예산수입지출서, 지출내용문건 등도 없다. 30년간 내부공문이 없는 공중에 뜬 상태였다. 


천신만고 끝에 행정서사 도움으로 하나씩 해체-복원을 했으나 그 작업량은 정말 지쳐 쓰러질 정도였다. 마지막 문교부 장관 허가 해체과정 1년 소요, 법원말소등기 위한 제출서류 작성 4개월, 그사이 포기와 시작을 몇 번씩 반복했다. “스승이 나를 믿고 부탁한 마지막 소원인데….” 난 다시 시작했고, 1년간 고생 끝에 법률, 사법, 행정서사를 총동원해 1992년 4월 13일 해체등록을 끝냈다. 두 달간 비용에 월급 몽땅 들어갔으니 집에선 생활비로 난리가 났고 그 후유증으로 몇 달간 시달렸다.



최덕휴 교수의 52세 때 표정


최 교수님께 전화로 종료 보고하며 비용도 언급했더니 격려는커녕 “왜 늦었어, 나 돈 없어!”였다. 2년 세월이 길다고 화가 난 것이다. 내용도 모르고 큰소리만 낸 교수님. 본심은 정직하신데 늘 입에서 욕설과 불똥이 튀는 성격이다. 그날 난 전화 충격에 큰 상처를 받았다. 상처는 곧 분노로 변했고, 그 후유증이 심해져 결국 앓아 누웠다. ‘저 불같은 고약한 성질 때문에 내 가슴에 멍을….’ 생각만 해도 금전문제와 정신적 고통, 시간 낭비 등으로 너무 속상했다. 사제지간이 원수지간으로 변한 그 아픔을 잊으려 몇년간 홀로 산에 다니며 삭혀 나갔다.



퇴임기념 고별특강, 필자는 강의내용을 기록해놨다. 


긴 세월 아픈 상처가 치유될 즈음 1998년 최 교수님의 별세소식을 접했다. 갈등으로 고민하던 나는 “그래도 내 스승이니 어쩌랴, 다 풀고 큰마음으로 속 시원하게 잊어버리자”며 빈소로 찾아가 마지막 예의를 지켜드렸다. 시간이 지나자 ‘스승의 마지막 소원을 내 손으로 깨끗이 해결했다’는 긍지와 자부심마저 느꼈다. 부족한 나를 지도해주신 스승의 은덕을 기리며, 그분의 미술교육업적 「INSEA-Korea 30년 활동변천사 연구」 등 논문 2편을 국제학회지에 발표하여 스승에 보답하는 제자로서 연구논문을 남겼다. 지옥 같은 INSEA-Korea 서류상자는 1999년 Y 박물관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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