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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이철이, 인정과 고집으로 살다간 화가

김정

나는 이철이(李哲伊, 1909-69)선생을 1953년 중학생 때 처음 뵈었다. 경복중학교에 낙방해 울고 있는 나를 누님이 끌고가 입학시킨 대동중학교 때다. 미술 시간에 국군 전투 진격장면을 그린 나를 선생님이 칭찬해 그 후 미술반에 들어가 고3 미술반장까지 했다. 학교 미술실은 낡은 2층이고 반 원은 19명이었다. 학교 미술반에선 수채화, 정물과 석고 데생 정도였다. 이철이 선생은 키도 눈도 작지만, 목소리는 크셨고 늘 몽둥이를 들고 다녔다. 작업은 밤에 혼자 수채화로 반추상을 하셨다. 내가 미술실에 와보면 밤새 작업하신 흔적이 있었다.

낮 3시쯤이면 가끔 미술실 밖에 허름한 아저씨 한 분이 미술 선생님을 기다리며 쭈그려 앉아 있곤 했다. 두 달에 한 번 정도 찾아오는 아저씨는 이철이 선생에게 작은 그림 하나를 두고 갔다. 두고 간 그림이 우리 미술실에 몇 개가 됐다. 맡긴 그림을 본 우리는“아주 유치하고 못 그렸다”고 했다. 그 당시 우리들의 우상은 도상봉(1902-77), 이마동(1906-80) 등이었다. 거기에 비해 허름한 아저씨의 그림은 ‘데생도 색채도 엉터리 싸구려 그림’으로 봤다. 일 년이 되니 그가 놓고 간 그림이 5, 6개쯤이고, 우린 그 그림을 장난으로 던지고 밟고 깔고 발차며 놀기도 했다.

어느 날 이철이 선생이 미술실에 있을 때 그 아저씨가 왔다. 선생님은 “어, 잠깐 밖으로….” 나가더니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아저씨에게 준다. 어느 날은 서무과에서 가불해 그분에게 주는듯했다. 나는 이철이 선생이 빚 갚는 줄 알고 선생님을 불쌍하게 생각했다. 우리끼리는 “우리 선생님이 얼마나 빚졌으면 저렇게….” “그런데 이상해, 돈 받는 주인이 왜 굽실거려?” 어느 날 내가 미술선생에게 물었다. “저분은 왜 자주 오세요?” “어, 고향 후배... 시끄러워! 니들은 그림이나 그려” 하시며 야단치듯 말을 막는다. 원래 무뚝뚝하셔 긴말 못하셨다.

아침 식사도 정문 앞에서 우동 드신 걸 본 애들이 많다. 이상한 게 많지만, 말이 없으시고 가끔 몽둥이 든 채 소리만 꽥 지르셨다. 사회와 담쌓고 사는 분 처럼... 내가 미술반 떠난 10년 뒤 1969년 별세하셨다는 소식 듣고 알았다.

나중 훗날에 놀라운 사실을 또 알게 된 것은, 우리 미술반 시절 늘 찾아왔던 허름한 아저씨는 바로 42세 박수근이었다. 같은 고향 강원도 후배인 그의 어려운 사정을 아는 이철이 선생은 찾아온 박수근에게 생활비 몇 푼을 주신 것이다. 선생님 본인도 어려운 형편임에도…. 그림을 들고온 박씨는 이 선생이 거절해도 슬그머니 놓고 갔던 것. 돈 받는 염치 때문에 그림을 놓고 갔던 것이다. 이 선생이 아침에 우동을 드신 건 일찍이 부인과 사별 후 오랜 독신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가슴 찡한 얘기다. 휴먼다큐 인간사를 돌아보는 흑백영화 한편 같다.




이철이 선생은 1909년 횡성 출생으로 춘천 고보를 거쳐, 일본문화학원 미술학부를 졸업하셨다. 초기 일본 유학파였고 이마동 등과 같은 시기 중고등학교 교사였다. 신조형파운동을 하던 중 어느 날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작업만 하셨다. 평소 과묵하셨지만 인정이 많으셨다.


- 김정(1940- ) 경희대 및 동대학원 서양화 졸. 숭의여대 정년 퇴임. 아우스부르그대 객원교수, 한독미술회 고문, 한국조형교육학회 고문. 국내외 개인전 23회, 아리랑테마로 49년 작업, 아리랑문화유산기념 워싱턴한국대사관 초청 아리랑특별전. 독일연구작업 4년. 미술관련 국제규격논문 23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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