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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욱진, 휴머니즘의 감동

김정

장욱진50세


장욱진58세

장욱진60세



장욱진72세


이 난은 작가기록 자료의 한 부분이다. 삶의 형태 및 현실기록은 작가론 또는 작가 작품연구에 인문학 기초 자료다. 진실한 자료는 평소 생활모습, 언행도 중요하다. 필자가 30년 석박사 논문지도 해오는 동안 느낀 건 국내기초 자료연구의 부족이다. 그 원인은 기록 및 자료를 경시해온 국민 정서의 영향도 컸다. 필자 나름으로 40년간 수첩이나 손 스케치 등, 기록해온 자료를 제한적 공개 됨을 밝힌다. 
필자가 장욱진 선생님을 가까이 뵌 것은 민병목 박근자 두 분의 추천으로 67년부터 앙가쥬망 회원이 되면서다. 1967년 신설동 시외터미널에서 회원들과 함께 덕소가는 버스로 장 선생 화실에 갔다. 50세이신 장 선생은 줄담배 피우시며 서서 계셨다. 회원 8명이 마당에 도착했고 최경한 회장이 “안녕하세요. 어떻게 잘 지내셨습니까..” 장 선생은 웃는 얼굴로 맞으면서 “지내진 않고 여기 이렇게 서서 담배 폈어요~ ” 응수하신다.
마당에 여럿이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데, 마침 동네 한 분이 왔다. 장 선생은 그분께 “면장님~~” 하신다. 나는 그분이 와부면 면장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얼굴이 길어서 면장(面長)’이라 불렀다는 장 선생의 남다른 유머를 봤다. 
1976년 설날 혜화동 장 선생님 댁에 신년 세배하러 몇몇 동인들이 방문했을 때도 맨발로 차디찬 마룻바닥에 앉아계셨다. 술 드신 후 더워 양말 벗고 담배 피신다는 것. 있는 그대로 사시는 모습 그대로다. 
“담배 맛이 좋~다. 설날이라 그런가 봐요” 멋쩍으신지 한마디 하신다. 
앙가쥬망 동인은 전국 스케치여행을 장 선생님과 자주 다녔다. 10년 여행 중 장 선생의 숱한 에피소드가 많다. 그중 하나를 본다. 남녀 15명이 전남 여수로 갔을 때 얘기다. 
1978.1.26 아침 서울역 출발, 여수에서 저녁 먹고 20시 부산행 밤배를 탔다. 밤새도록 온 배는 27일 새벽 4시 반 부산부두에 도착. 컴컴한 연안에 목욕탕을 찾았으나 문 닫고 없어 할 수 없이 동래온천으로 갔다. 
이곳도 새벽이라 문 닫은 상태. 근처 여관에 들어가 4~5명 들어갈 작은 욕탕을 발견했다. 주인에게 사정해서 더운물 좀 넣어달라 하고는 모두들 욕실로 들어갔다. 물은 안 찼으나, 너무도 춥고 피곤해 소형 탕이지만 염치 불구 모두 끼어들어 갔다. 
작은 욕탕에 남자 9명이 들어가니 물이 차오른다. 끼어 앉은 자세는 각자 최대한 움츠렸다. 뒷사람의 무릎뼈가 앞의 옆구리를 찌르기도 한다. 장 선생의 날카로운 엄지발톱은 유명하고 특이하다. 그 발톱은(속칭 아라비아 장으로 독수리 발톱처럼 뾰족함) 앞사람 엉덩이를 찌르고...
그런들 어쩌랴. 추운 밖보다는 탕속인데... 물이 점점 차올라와 목까지 왔으나, 더 움직일 수가 없다.
물차 오른 이 꼴들이 서로 우스워 그저 깔깔댄다. 같이 쭈그리고 앉아있던 장 선생왈 “어~ 그거 따듯하고 괜찮아....허허허허~ 여기서 딱 한잔하면 더 좋을 거요~”  탕속에 같이 있던 동인들은 일제히 폭소가 터졌다. 그러나 맘껏 웃을 수도 없을 만큼 꽉 끼어 있는 몸이라 웃음반 비명 반이다. 마음은 웃음이 절로 나오지만 육체는 죽을 지경이다. 그래도 깔깔 데고 웃음이 나왔다. 그야말로 동고동락동좌동소(同苦同樂同坐同笑)다.
그때 장 선생의 나이가 딱 환갑이셨다. 
이게 한가족 아니면 안 되는 일이다. 또 가족이라고 쉽게 되는건가? 
이건 마음 벽을 허물고, 그러면서도 장욱진이라는 인간미와 예술을 존경하고 소통된다는 의미다. 벌거벗은 상태에서 더 이상 무엇을 가리고 감춘단 말인가.
예술이란 건 반드시 엄숙하고 고상한 것만이 아니다. 인간의 휴머니즘을 숨김없이 전달하는 감동이 담겨 있어야 본질이리라.
그런 면에서 장욱진 선생의 철학은 휴머니즘의 감동이라고 본다. 
나는 그런 인간적 모습을 30년 앙가쥬망 동인활동에서 장욱진 선생을 배우려 노력했고, 그 모습들을 내 나름 작은 손스케치와 기록으로 담았다. 
그러다 보니 장 선생의 평소 옆모습 앞모습 뒷모습 스케치 소묘를 많이 갖고있다. 나의 스승으로 모신 장선생님의 그 모습들을 수첩에 그리고 싶었다. 
이런 기록들이 알려져 필자는 2015년 4월 28일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개관 1주년 기념 때 장 선생모습 손스케치 소묘 25매를 특별전시까지 하게 됬었다. (참고로 개관기념특강 실시함. 1부: 김정. 2부: 최종태)
장 선생은 그렇게 많이 피우시던 담뱃값도 모르고 평생 담배를 피우셨다. 
76년 어느날 동인전 모임에서 담배얘기가 나왔을때 내가 장 선생께 여쭤봤다.
“선생님, 그 담배 어디서 사셨어요? ”
“아 그건 우리동네 앞 담배가게에서 달라면 그냥 바로줘요” 
“공짜로요? 값이 얼만데 그렇게 매일 줍니까?” 
“응 그건 난 몰라요, 달라면 공짜로 줘요~ 김총무님도 한갑 달라고 해보소~ ”
이말을 바꿔보면 담배값도, 세상 물정도 모르신다는 의미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얘기와 같다. 
아마도 담뱃값 계산은 지정된 동네 앞 가게일 것이다. 나중에 사모님께서 다 값을 정리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평생을 뒷바라지만 해오신 이순경 여사의 고생이랄까 숨은 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녀를 키우시면서 또 생계를 위해 서점(혜화동 동양서림)을 운영해온 사모님의 인고(忍苦) 는 얼마나 컸을 것인가. 앞이 안 보이는 안개 속을 걷는 심정으로 보살펴 오신 끝에 오늘의 장욱진이란 위대한 작가가 탄생된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이 된다. 
1978년 장 선생 환갑기념전시가 드디어 계동 공간사랑에 열렸다. 그림과 작가의 진가가 알려져 거의 매진되다시피 했다. 그 후 장 선생께서 동인들 모임에서 취중농담으로
“내 그림도 사가네요.....~~허허허...”  신기하고 기쁘기도 하신 표정이었다. 
장 선생이 동심 같은 꿈과 마음을 한평생 간직한 채 작업을 해오신 뒤에는, 결국 그 꿈만큼 가족들의 정성과 눈물과 땀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생각이다.
선생께선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것 까지도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갑자기 속세를 떠나셨다. 
이것 역시 우연치고는 정말 묘하다. 사람이 살고 죽고하는 문제는 얼마나 복잡한가. 그것 자체가 얽히고설키는 인간사니까... 그러나 장 선생은 마치 소설이나 동화책에 나오는듯하다. 그분의 마지막 장면을 본다. 
평소 용인에 사시던 장 선생께서 1990년 12.27 낮 서울에서 지인과 점심 약속이 있었다. 점심을 맛있게 드시고 나서 좀 쉬시다가 갑자기, 
“....... 그런데 머리가 좀 아파요...머리가.....어어.....머리... .머어리이가 자꾸 아파파.... ” 
점점 통증이 심해지자 곧바로 안국병원으로 찾아갔다. 
병원 도착 직후 까지도 의식을 잃지 않으셨기에 긴급 처방 후 침대에 누워 잠깐 잠드신듯하시다가, 바로 16시30분 그대로 숨이 멎으셨다. 사인은 심장마비사망. 믿기지 않을 정도다.
시신은 용인으로 옮겨졌고, 밤 11시 최경한, 김정, 이만익, 박한진 등 앙가쥬망동인 4인이 용인으로 달려가니 이춘기 김재임 최종태 등 3인이 와 있었다. 상주 가족은 모두 정신을 잃은 듯 멍하니 벽만 바라보며 있고, 새벽 5시 현재까지 전혀 식음을 전폐하신 가족들.. 
너무나도 급작스런 일이 닥쳐와 어떻게 장례대책 겨를도 없었다. 결국 장 선생님의 장남과 큰사위 등과 의논해 대책을 협의해 장례를 끝냈다.       
결국, 장욱진 선생은 생전에 활동하시면서도 현실과 다른 동화 나라 꿈에서 사셨다. 가족은 힘들었으나 그로 하여금 보는 사람도 즐겁고 그리는 작가도 즐겁고 주변이 즐거웠다. 
그것은 정녕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장욱진 선생만이 품어낸 천성적인 아름다운 휴머니즘인 것이다. 바로 그런 마음을 작품에서 보여주셨고 즐거운 일생을 마치 동화처럼 살다가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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