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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이미지 통치술 혹은 책거리 문화

윤범모

호피장막도, 19세기, 8폭병풍, 삼성미술관리움 소장


“저 해괴한 그림을 그린 자를 멀리 귀양 보내라.” 임금님의 화는 하늘에 닿았다. 측근에 두고 아끼던 화가를 이렇게 목을 치고 유배를 보낼 수 있다니! 화원은 도대체 무슨 그림을 그렸길래 이렇듯 날벼락 맞았는가. 화원 상대의 중간고사, 시험문제는 자유였다. 다만 5일간 8폭병풍 한 점을 그리라고 했다. 평소 기량을 발휘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소재를 그려 냈다. 문제는 응시생 신한평과 이종현의 그림이었다. 이들은 자유라는 출제 방식만 믿고 진짜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다. 이에 임금은 분노했다. 아무리 그림 소재의 자유라 했지만, 이들은 ‘당연히’ 책거리 병풍을 그려야 했다. 그들은 책거리의 ‘선수’였던 모양이다. 책거리를 그리지 않았다 하여 파면되고, 거기다 먼 곳으로 유배까지 가야하는 정말 ‘해괴한 사건’은 이렇게 하여 일어났다. 1788년 정조대왕 때의 일이다. 자비대령화원 상대의 3차 시험에서의 일. 책거리를 그리지 않아 귀양 간 화원, 즉 신한평은 혜원 신윤복의 아버지이고, 이종현은 책거리의 명가인 화원 이형록의 할아버지였다. 정조에게 있어 책거리는 무엇이었던가.
어느 날 정조는 용상 뒤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신하들은 ‘책’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임금은 ‘이것은 책이 아니고 그림이다’라고 말했다. 책이 아니라 그림이다. 책가도(冊架圖) 병풍은 이렇게 하여 유행하기 시작했다. 조선 건국초기부터 활용하던 일월오봉도 병풍 대신, 책가도가 임금 권위의 상징으로 등극했다. 임금노릇을 잘하기 위해 정조는 학문을 숭상하고 예술을 즐겼다. 자신의 문집 『홍재전서』와 같은 엄청난 분량의 저술을 했고, 또 출판 진흥에도 힘을 기울였다. 책가도의 상징성,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괜히 파벌 만들어 권력싸움이나 일삼지 말고 오로지 학문을 연마하여 인격도야 하라.” 대충 이런 의미를 담은 책가도가 아닐까. 그렇다면 정조는 미술을 통치술로 활용한 희귀한 사례의 군왕이 된다. 이미지와 권력관계를 연구하게 하는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이 된다는 의미이다. 오, 정조대왕님, 미술을 통치술로 활용하시다니!
조선후기의 책거리 문화를 재조명해야 한다. 한국회화사의 주류는 수묵 문인화가 아니라 채색화이다. 채색의 역사는 고구려 고분벽화로부터 고려불화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찬란하게 전통을 이어왔다. 물론 채색의 보루는 사찰이었고 민간이었다. 궁정회화에서 채색의 비중은 매우 높았다. 책거리나 문자도 같은 병풍이 이 점을 입증하고 있다. 책방 하나 없었던 조선시대에 책거리 병풍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책(교육)은 왕공사대부 지배계층의 독점물이었고, 또 비싼 고가품이었다. 책 그림은 책가를 없애고 책거리로 확대되어, 책거리 문화가 형성되었다. 표현형식이나 화풍의 변화를 주면서 채색화의 영토를 확장시켰다. 오늘날 책거리에 대하여 외국인이 열광하고 있는 이유를 헤아려야 한다. 어쩜 우리만 우리 것의 장점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다. 이른바 ‘민화’라는 용어도 폐기하고, ‘우리 그림’으로 국제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길상화(吉祥畵)의 장점을 선양해야 한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은 재개관 기념으로 8월 28일까지 ‘조선 궁중화 민화 걸작:문자도와 책거리’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다. 우리 채색화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는 현장이다. 일생에 두 번 다시 보기 어려운 ‘희귀한 전시’일지 모른다. 그만큼 이 전시는 민관이 협력하여 국공립미술관 소장품은 물론 개인 비장품까지 어렵게 모았기 때문이다. 명품의 행진, 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그림의 전당, 책거리 특별전은 이 무더운 여름에게 보내는 청량제와 같다. 현대성까지 느끼게 하는 단순 구도의 <책가도>(국립고궁박물관 소장)부터 책과 도자기 등 각종 수입품을 함께 그린 병풍(삼성미술관리움 소장)과 그리고 개인소장 작품들은 한마디로 찬란하다. 흥미로운 작품은 화원 장한종의 <책가도>(경기도박물관 소장), 휘장을 걷어 올려놓고 내부의 책가를 표현한 것으로 작가명을 알 수 있는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장한종은 귀양간 화원 대신 임명 받은 실력파였다. 눈길을 강하게 끄는 작품으로 <호피장막도(虎皮帳幕圖>(삼성미술관리움 소장)가 있다. 이 작품은 8폭병풍 형식으로 호랑이(사실은 표범) 가죽을 화면 가득 묘사하여 추상회화를 보는 분위기를 보이고 있고, 특히 가운데 2폭의 가죽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책가를 삽입했다. 책거리의 다양한 표현 형식과 독창성, 시대정신, 이는 21세기 한국미술계에서 창조적으로 계승해야 할 특징이 아닌가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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