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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백남준 10주기에 ‘파격’을 생각한다

윤범모

요셉 보이스를 추모하는 진혼굿 퍼포먼스 <늑대 걸음으로>를 행하는 백남준, 1990년


“그 깐 왜년 새끼를 왜 낳습니까?”

파격이었다. 초면에 내뱉은 대답, 그것은 상상 밖의 파격이었다. 슬하에 자녀를 어떻게 두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그랬다. 의례적 인사에 대한 반응은 상식을 초월했다. 1980년대 뉴욕 소호의 백남준스튜디오에서였다. 당시 나는 이른바 ‘미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 미술계 일주여행을 하고 있었다. 워싱턴 정부는 방문 희망 도시와 기관 등을 연결하여 의미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 가운데 만나고 싶은 미술인 명단도 있었고, 그 명단에 조지 시걸이라든가 크리스토 같은 작가명이 들어 있었다. 뉴욕을 통과하면서 백남준이란 이름을 누락시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하여 워싱턴 정부의 중간역할로 나는 백남준 스튜디오를 공식 방문할 수 있었다. 소호의 스튜디오에 들어서니, 백남준은 부인 구보타 시게코와 함께 반갑게 맞아 주었다. 구보타가 마실 것을 가지러 간 사이, 나는 ‘슬하의 자녀’에 대하여 질문했다. 대답은 의외로 ‘왜년 새끼’였다. 파격, 바로 그 자체였다. 한동안 나는 말문을 잇지 못했다.

백남준은 비디오아트의 선구자로서 현대미술사에 족적을 뚜렷하게 남겼다. 6·25전쟁을 치른 가난한 나라 출신, 그러니까 TV 보급률이 바닥 수준이었을 한국 출신이 TV를 활용한 전위 예술을 펼쳤다는 것, 그것은 ‘하나의 역설’이었다. 작가의 조국은 TV가 무엇인지, 비디오가 무엇인지, 그 존재 자체도 잘 몰랐을 때, 백남준은 새로운 매체로 예술행위를 실천했다. 하기야 백남준의 등장 자체가 파격의 출발과 다름없었다. 1959년인가, 백남준은 독일에서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라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그때 백남준은 해머로 피아노를 때려 부쉈다. 언론에서는 문화 테러리스트를 국외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뒤에 백남준은 활동 무대를 뉴욕으로 옮겼다. 그는 첼리스트 샬럿 무어먼과 누드 공연을 실행하여 경찰에 끌려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누드 공연’의 합법을 이끌어냈다. 파격, 파격의 연속이었다.
숱한 작품과 화제를 남겨놓고 백남준은 이승을 떠났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10주기를 맞아 현대화랑을 비롯한 백남준아트센터, 서울시립미술관 등 몇 군데에서 기념행사를 마련했다. 특히 1988년 국내 최초로 백남준 개인전을 개최했던 갤러리현대(당시 현대화랑)는 이번에 ‘백남준, 서울에서’라는 제목으로 추모전시를 열었다. 1980년대의 < 선덕여왕>이나 <로봇 가족: 할아버지 > 등 백남준의 대표작들이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특히 전시장 입구 한 층을 채운 <늑대 걸음으로>는 인상적이었다. 백남준은 1990년 요셉 보이스를 추모하기 위해 현대화랑 뒷마당에서 굿 형식의 퍼포먼스를 실연했다. 이번 전시는 26년 만에 재현한 것으로, 피아노와 속이 빈 12대의 TV, 한복과 갓 등이 다시 나왔다. 주인공은 떠났지만, 예술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과거를 추억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일 하나. 개막행사에서 원로화가 김창열은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재연했다. 그는 바이올린을 끌고 와 전시장 입구에서 단숨에 부숴버렸다. 아무리 재현이라 하지만 일말의 주저함이라든가 고민의 제스처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백남준과 김창열이라는 조합은 절묘했다. 백남준의 작가적 특성은 한마디로 ‘변화무쌍’이라 할 수 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같은 패턴에서 안주하지 않고,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는 백남준, 그는 진정 노마드의 후예였다. 하지만 김창열은 평생 ‘물방울’이라는 브랜드 한 가지로 자신의 세계를 꽉 채웠다. 그것은 ‘천편일률’이라는 단어와 직결되기도 했다. 유목과 안주(安住). 백남준 10주기 추모 현장에서 관객은 ‘변화무쌍 : 천편일률’을 보면서, 불편한 생각을 가졌을지 모른다. 과연 절묘한 조합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날 전시장을 가득 채운 목소리, ‘머물러 있지 말고 뛰어라!’ ‘획일화에서 벗어나라!’ 나는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답답했다.

백남준의 세계는 파격의 연속이었다. 파격, 이는 상투적인 관습의 세계와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하기야 예술 그 자체가 파격의 덩어리 아니던가. 획일화 사회에서 백남준의 목소리가 그리운 것은 왜 그럴까. 파격! 파격! 파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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