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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나혜석의 절규, 아직도 들려오고 있다

윤범모

나혜석, 자화상,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소장, 유족 기증


“나는 이것을 가지고 파리로 가련다. 살러 가지 않고 죽으러. 가면서 나의 할 말은 이것이다. ‘청구 씨여. 반드시 후회 있을 때 내 이름 한 번 불러 주소. 사 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 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이었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어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

절규, 과도기에 산 한 선각자의 절규이다. 사회 제도와 인습의 희생자, 바로 나혜석이다. 나혜석은 강제 이혼당하고, ‘이혼고백서’를 잡지에 연재하고, 스캔들의 원인제공자인 최린을 상대로 법정 소송 제기하고, 결과적으로 잊힌 여인이 되었다. 나혜석의 파리행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덤 앞의 꽃 한 송이는커녕 나혜석은 무덤조차 남기지 않았다. 나혜석은 행려 사망자로 초겨울의 길에서 홀로 이승의 발걸음을 멈추었다. 자녀들조차 자신의 생모가 언제 사망했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자녀들은, 나혜석은 ‘나쁜 여자’라고 교육받아 만나주지도 않았다. 혈육의 정조차 나눌 수 없었다니, 이는 비통한 일이지 않을 수 없다. 
나혜석(1896-1948)의 이름 앞에 흔히 ‘선구자’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물론 나혜석은 선구자이다. 그는 1910년대부터 근대기 최초의 여성 유화가로 활동했다. 『경희』와 같은 소설을 발표한 문학가로서도 빛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나혜석은 가부장 제도의 사회에서 여권 신장을 위한 여성운동가로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이 때문에 나혜석 이름 앞에 단순히 선구자라는 수식 하나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시대를 너무 앞질러 간 것이 문제일까. 정조는 취미라고 주장했던 것이 화근이었을까. 나혜석은 사회적으로 매장되어 생애의 만년을 외롭게 보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줄기차게 그림을 그렸고, 글을 썼다.  
나혜석의 막내아들(김건)은 한국은행 총재로 취임했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생모인 나혜석의 존재를 부인했다고 전해진다. 나혜석은 자신의 자녀들과 오붓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생모를 부인하는 자식, 나는 가슴이 아팠다. 나혜석 2세들에게 ‘어머니’를 찾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나는 나혜석 관련 책을 2권이나 출판했다. 나혜석의 거룩한 발자취를 정리하고, 또 역사적 평가를 시도한 내용이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나혜석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나혜석의 고향 수원시는 나혜석 거리를 조성하고 동상을 건립했다. 그동안 크고 작은 나혜석 관련 행사가 많았다. 하지만 나혜석의 자녀들은 나혜석의 행사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김건 총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회적으로 ‘나혜석의 아들’임을 밝히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혈육 관계임을 가슴에 안고 살았다. 그는 자신의 집 거실에 나혜석의 작품 즉 모친의 <자화상>과 부친 <김우영 초상>을 걸어놓고 살았다. 아들은 근래 이승을 떠나면서 유언을 남겼다. 생모의 그림을 미술관에 기증하라는 것. 그래서 최근 개관한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은 제1호 기증작품을 접수하는 행운을 안았다. 그동안 어떤 전시에도 빌려주지 않았던 희귀작품이다. 유족의 작품 기증은 정말 멋있는 결단이었다. 60년이 넘어 어머니의 무덤에 꽃 한 송이를 올린 셈이 되었다.
나혜석연구, 더욱 필요하다
나혜석 학회가 결성되어 활발한 학술활동을 하고 있다. 이번에 수원시 지원으로 『나혜석 연구총서』를 발간했다. 그동안 나혜석 관련 연구 논문 가운데 우수작 80여 편을 집성한 총서이다. 문학, 여성, 미술, 독립운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 성과물이다. 한 개인을 연구하기 위하여 학회가 결성되었다는 사실도 이색적이지만, 이렇듯 두툼한 양의 총서 발행 역시 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총서의 논문 목차를 보면, 화가 나혜석 관련 미술사 논문은 초라한 편이다. 그 많은 미술이론가는 어디에 있었던가. 왜 남의 나라 미술에만 그렇게 빠져 있는가. 『나혜석 연구총서』가 주는 교훈. 문학사의 풍성한 논문 숫자와 비교하면 미술사의 소략함은 반성하게 한다. 총서 발행의 책임자로서 나의 소회는 그랬다. 나혜석은 거대한 담론 제공의 원석과 같다. 나혜석의 절규는 아직도 살아 있다고 믿는다. 나혜석이란 산맥을 넘어야 한국미술의 미래가 더 밝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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