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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간 미술가들과 전후 북한 미술’ 학술심포지엄, 국립고궁박물관

객원연구원


심포지엄이 개최된 국립고궁박물관

2019년 10월 18일 금요일 오전 9시30분~오후 4시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 주최의 북한 미술 학술심포지엄 ‘북으로 간 미술가들과 전후 북한 미술’이 국립고궁박물관 본관 강당에서 진행되었다. 이번 심포지엄은 2019년 5월 17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1차로 개최된 ‘분단의 미술사 잊혀진 미술가들’ 학술심포지엄에 이어 2차로 개최된 것이다. 1차 심포지엄에서 월북미술가 연구사를 점검하고 후손들과의 좌담회가 이루어졌다면, 2차 심포지엄에서는 월북미술가를 재조명하고 북한 내 사회주의 사실주의 미술의 형성에 대해 집중했다.

이날 사회는 정창운(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 연구관)이 맡았으며 식전행사로 국민의례, 노명구(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 연구실장)의 개회사로 진행되었다. 본격적인 연구 주제발표는 총 2부로 나누어 이루어졌다.



노명구 연구실장은 “사라져 가는 월북미술가들의 작품에 대한 연구가 시급하다고 생각하여 작년부터 미술문화재연구실에서 월북미술가들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고 밝히며 “연구 성과를 공유하는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근대미술의 가치에 대한 이해가 새롭게 이루어지고, 연구 활동이 보다 활성화되기를 바란다”고 언급했다.

1부는 ‘월북미술가 재조명’에 대한 3개의 연구주제 발표로, 발표자당 약 30분의 발표 시간이 배분되었다. 개별 질의는 따로 진행되지 않았다.



1부 첫 번째 발표자인 권행가(성균관대학교)는 이번 프로젝트의 연구책임자를 맡아 7개월 동안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프로젝트의 연구 성과인 ‘월북미술가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조사 연구 현황 및 과제’를 발표했다.

1. 조사 대상: 32인의 월북 미술가들
조사 대상으로 월북미술가를 선정하는 기준 일제강점기, 또는 해방기에 남한지역에서 주요 활동을 하다가 월북한 작가로 설정했다. 이를 통해 설정된 32인의 월북미술가(강호, 기웅, 길진섭, 김건중, 김경준, 김만형, 김용준, 김일영, 김정수, 김주경, 박문원, 박승구, 박용달, 배운성, 손영기, 엄도만, 유진명, 윤자선, 이건영, 이석호, 이순종, 이여성, 이쾌대, 이팔찬, 임군홍, 정온녀, 정종여, 정현웅, 조규봉, 채남인, 최은석, 최재덕)를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했다. 
2. 북한 미술 관련 주요 서지자료 및 소장 현황
 1) 『조선미술』: 32인의 월북미술인들의 활동이 가장 많이 실려 있는 대표 자료로, 1957년 창간되어 1967년까지 발간된 기관지이다. 처음에는 조선미술가동맹의 기관지였다가 1961년 2월 김일성에 의해 조선문화예술총동맹 연합조직이 다시 부활되면서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기관지로서 역할을 했다. 때문에 『조선미술』은 사회주의 기초 건설기에 북한의 미술 교육, 각종 전람회, 동구권간의 해외 교류 등의 미술 활동에서부터 각 부문별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조형이념과 방법론의 구축을 위한 평론 활동 등 당의 정책을 미술 내에서 구현하는 핵심적 논의의 장 역할을 했다. 주로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활동한 월북미술인들은 조선미술가동맹에서도 각 분과 위원장이나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미술』에 이들의 비평문과 작품이 자주 실렸다.
 2) 잡지 및 신문: 『로동신문』(당기관지 1945년 창간), 『민주조선』(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정무원 기관지 1946-), 『문화전선』(북조선예술총동맹 기관지 1946.7 창간 총 5호 발간, 1948년 『주간신문』으로 개편), 『문학예술』(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기관지 1948.4-1953.9), 『문학신문』(작가동맹 중앙위원회 기관지 1956.12 창간-현재), 『조쏘문화』(조쏘출판사, 1947?-), 『조선영화』(군중문화출판사, 1957-, 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1962.4-1967.12) 이후 문예출판사 등), 『력사과학』(사회과학원출판사), 『문화유산』(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기관지, 『천리마』(문예출판사, 1959.1 창간 대중교양 종합지), 『주보민주주의』 등
 3) 단행본 및 도록: 『조선중앙연감』(조선중앙통신사, 1949-), 리재현의 『조선력대미술가편람 증보판』(199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10주년기념작품집』(1958), 『주체미술교육의 빛나는 50년 평양미술대학 창립 50돐 기념 화첩』(1997), 『조선미술박물관』(일본조선화보사, 1980), 『현대조선미술명품전』(1983) 
3. 저작물은 919점, 작품은 1531점이 아카이브로 구축되었다.
4. 성과 및 향후 과제
 1) 성과: 월북미술가 32인에 대한 저작물 기록 정리를 통한 연구 토대 마련/작품 발굴, 정리 및 관련 기록 정리/남북한 통합된 작가 연구의 토대 마련/월북미술인 연구의 시공간적 영역의 확장/장르 연구의 편중성 확장의 필요성 대두
 2) 향후 과제: 월북미술인 범주의 확장, 조사의 계속성 확보/원자료 데이터 베이스 구축을 통한 연구 토대 마련/한반도를 넘어선 시야의 확대: 20세기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 미술사로 확장/국내 소장 작품들의 저작권 문제에 대한 방안 마련



두 번째 발표자인 김명주(미술문화재연구실 연구원)는 ‘북한 미술사의 초석을 쌓은 미술가들’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1. 해방기 한국미술사 연구
해방기의 남한 미술계는 일제 청산, 미족미술의 정체성 확립, 좌우이념의 대립과 사회주의 미술이론의 유입 등에서 분열되어 체계적인 고미술 연구가 수행될 수 없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민족미술’, ‘전통미술’ 수립을 위한 다양한 논의들이 오가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는 분단 이후 미술계가 재편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고, 월북미술가인 이여성, 김용준, 정현웅, 박문원의 미술론은 초기 북한미술사의 흐름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2. 전후 월북미술가들의 한국미술사 연구
 1) 정현웅의 『조선미술이야기』: 전체 6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전체의 약 50% 정도를 고대 부분에 할애하고 있다. 일제에 의해 자행된 전통문화유산의 파괴, 수탈, 왜곡된 상황을 설명하고, 인민에게 과거의 우수한 전통과 문화의 풍습을 바르게 알리고자 했다. 
 2) 이여성의 『조선미술사개요』(평양: 국립출판사, 1955): 북한에서 발간된 최초의 조선미술사라는 데 의의가 있다. 특히 해방 후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서술한 최초의 미술사로 북한의 마르크스주의 미술사 인식의 기초가 되었다. 
 3) 박문원: 은 좌파미술의 편에서 삽화가, 장정가, 비평가, 번역가 등으로 활동하며 북한식 미술사 기초를 구축했다. 소비에트 미학의 편에서 사회주의리얼리즘의 강령을 동시대 미술에 관철하고자 노력했다. 
3. 석굴암으로 본 미술사 담론 논쟁
일제강점기에 세키노 타다시에 의해 시작된 석굴암 연구에서 석굴암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만든 인공석굴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신라인의 창의로 만들어진 축조된 석굴이라고 설명하면서 신라인의 독창성을 높이 평가했다. 이여성은 석굴암을 사실주의 미술로 주목했는데, 석굴암의 ‘사회주의적 측면’과 ‘사회 계급적 측면’에 주목하면서 석굴암을 8세기 신라사회의 현실에서 진실을 추출하고 전형을 찾으려고 한 대표적인 사례로 보았다. 석굴암 조각을 “참으로 훌륭한 사실주의적 예술”이라고 규정하고 그 시대 “사실주의적 예술의 최고 수준”의 대표작으로 이해했다. 반면 김용준은 이여성의 주장에 대해 민족 허무주의, 비속 사실주의로 비판했다.
이처럼 해방 이후 북한미술 형성기(1950~1960년)에 월북미술가들은 북한의 미술담론과 미술사 연구 분위기를 이끌어 향후 북한 미술사 서술의 방향을 제시했다. 



세 번째 발표자인 김가은(미술문화재연구실 연구원)은 ‘초기 북한미술의 토대 구축과 전개’에 대해 발표했다.

1. 해방공간의 북한미술
 1) 북한 문예계 단체 결성: 해방 직후 문화예술인들의 자주성 회복을 주장하는 평양문화예술협회와 평남지구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이 경향적으로 대립된 구도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이 기존 예술단체를 정리 및 통합하고, 부문별 동맹을 만들어 예술총연맹 같은 중앙 조직을 결성할 것을 주문하여 1946년 1월 평남지구예술동맹이 결성되었고, 문학, 연국, 미술, 음악 등 각 부문별로 동맹체가 조직되었으며, 이후 1946년 3월 북조선예술총연맹의 통합조직이 출범했다. 그러나 북조선예술총연맹 내부적으로 조직 개편에 대한 요구가 상당했고, 이에 1946년 10월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 개편됨으로써 문예계 조직화 작업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
 2) 북조선미술동맹: 정관철의 ‘미술동맹 4년간의 회고와 전망’: 평양에서 태어나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정관철이 1949년 해방 4주년을 기념하여 쓴 글로, 해방공간의 북한미술계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정관철은 해방 직후 화단에 대해 각 지역에서 미술가 단체가 우후죽순 설립되었고, 지방 단위로나마 전람회 선전공작을 벌였다고 회상했다. 1946년 북한 화단에 대해서는 “북조선의 미술가들이 조국 건설을 위하여 그야말로 열성을 다하여 분투하였다”고 하며 미술품 제작의 양적 측면을 강조했다. 1947년의 회고에서는 작품 제작의 양적 측면을 먼저 언급하면서도 대중 미술보다는 개별 작가와 작품을 미술계 성과로 나열하고 있다.
2. 6.25 전쟁과 전후 북한미술
월북미술가들은 월북이후 화단에 즉시 투입되어 미술활동을 벌였다. 정현웅은 국립미술제작소의 회화부장에 선임되었고, 박문원과 김용준은 조선미술가동맹에서 각각 부위원장과 조선화분과위원장에 선출되는 등 요직에 기용되었다. 정온녀, 정종여, 임군홍은 군대와 인민의 투쟁상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제작해 차츰 북한미술계에 동화되어 갔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에는 표현방식이나 기법적 측면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는데, 이는 이들 대부분이 일본에서 모더니즘과 형식주의 사조를 공부하고 졸업하여 그 기법을 월북직후 작품들에도 그대로 적용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변월룡은 북한미술계 재건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평양미술대학 학장으로 파견되었다. 1950년대 중반에는 김용준과 이여성에 의해 전통수묵화에 대한 미술계 담론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담론은 김일성의 교시로 인해 채색화 중심의 조선화로 확립되었다. 이는 곧바로 반영되어 필선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 기법으로 채색을 통한 북한식 몰골법이 조선화로 확고히 자리잡았고, 이후 북한미술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지니며 작품의 개성이 사라지고 점차 획일화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점심식사 후 오후 1시부터 진행된 2부는 ‘북한 사회주의 사실주의 미술 형성’에 대한 5개의 연구주제 발표로 이루어졌으며, 발표자당 30분의 시간이 주어졌다. 1부가 총론이라면 2부는 개별 작가를 살펴보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2부 첫 번째 발표자인 홍지석(단국대학교)은 ‘길진섭 연구의 현황과 쟁점’에 대해 발표했다. 

1. 1945년 이전의 길진섭
길진섭은 1927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1923년 졸업했는데, 재학 시기인 1930년 겨울 구본웅, 김응진, 이마동, 김용준 등과 백만회(백만양화회)를 조직했다. 백만회는 예술이 아닌 일체의 것과 비정신적인 일체의 것에 무관심할 것이라 주장하며, 예술이 사회 사상의 포로가 된 상태와 목적의식적 내용을 반대하는 성격을 가진 조직이었다. 길진섭은 백만회에 가담한 이후 동경미술학교 재적한 학생들로 조직된 동미회 제2회전에 작품을 출품했고, 1934년 백만회 출신이 주축이 되어 창립한 목일회에 가담했다. 1936년에는 김환기, 쓰루미 닼나가, 간노 유이코, 후나코시 미에코 등과 함께 또 하나의 백만회를 조직해 활동하기도 했다. 1939년에는 『문장』 제작에 관여하였고, 1941년 문장이 폐관된 후에는 잡지 『춘추』에 관여하여 일련의 표지화를 제작했다. 
2. 월북 이후의 길진섭
길진섭은 서울에서 조선미술건설본부 선전미술대장, 조선조형예술동맹 부위원장, 조선미술동맹 서울시지부 위원장,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과 교수 등 요직에서 활동하다 1948년 8월 해주에서 개최된 최고인민회의에 참석한 후 돌아오지 않는 방식으로 월북했다.
월북 이후 북한미술계에는 순조롭게 정착했는데, 1951년 조선미술가동맹의 부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1956년에는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발행 잡지 『미술』의 편집위원, 1957년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기관지 ‘조선미술’ 편집위원을 역임했고 1957년 12월에는 ‘쏘련미술 아까데미야 창건 200주년 기념보고대회’ 참석차 소련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처럼 길진섭의 전성기는 조선미술가 동맹부위원장을 역임한 1951년~1963년에 해당되며, 이후 1963년 조선미술가동맹 부위원장직을 사임하고 1975년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두 번째 발표자인 홍성후(명지대학교)는 ‘1950년대 이쾌대(1913-1965)의 인물화 연구: 조중 우의탑의 벽화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1. 이쾌대의 1950년대 인물화와 군상 제작
이쾌대는 1950년 9월 국군에 의한 서울수복 당시 체포되어 포로가 되었고, 1953년 포로교환협정에 따라 8월에 월북했다. 이쾌대는 1954년부터 전후 건설성 미술제작소 미술가로, 조선미술가 동맹 평양시와 자강도 현역미술가로 선출되어 작가로서의 활동을 이어갔다. 1957년 조선미술가동맹의 회화분과가 조선화분과와 유화분과로 분리된 직후 조선미술가동맹 유화분과 임원에 선임되었다. 또 같은 해 『미술 써클원수첩』에 「인물화 기법」을 발푷해 미술교육 기초에 기여했다. 1958년 조선미술가동맹 ‘동맹 력사편찬위원회’ 신설이 결정되자 이쾌대는 ‘해방 후 남반부 편집 그루빠’의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같은 해 5월 29일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를 기념하여 열린 《환송가두전람회》에 <상감령 전투>를 출품하여 주목받기도 했다.
2. 조중 우의탑 벽화 제작과 그 의의
조중(朝中) 우의탑(友誼塔)은 1958년 10월 북한에서 공식 철수할 중국인민지원군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가 설립 결정한 것으로, 기념비는 조선건축가동맹의 리영이가 설계했으며 기념비 좌우측 장식 부각에는 조선미술가동맹 조각분과가 투입되었다. 이쾌대가 총괄한 벽화는 내부 중앙의 <승리도>와 좌우측의 <참전도>, <건설도>이며, 이 중 <승리도>는 이쾌대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다.
 1) 설립 과정: 조중 우의탑은 숭고한 국제주의적 정신의 상징이자 영원한 조중친선의 상징이었다. 양국의 친선을 상징하기 위해 좌우측에는 각 길이가 7.2m, 높이 2.7m의 대부각이 설치되어 있고, 탑신에는 ‘우의탑’이라는 세 글자가 금각으로 새겨졌으며, 그 아래에는 벽화가 그려진 탑 내부로 들어가는 정문으로 구성되었다. 우의탑 내부 석실 입구에 들어서면 좌측에 세로 2m, 가로 3m의 <참전도>, 중앙에 세로 2m, 가로 7m의 <승리도>, 우측에 세로 2m, 가로 3m의 <건설도>로 구성되었다. 이쾌대는 『조선미술』에 “중국인미지원군이 이 땅에서 이룩한 허다한 영웅적 투쟁 행정과 교훈은 벽화 사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더욱이 통절하게 나의 가슴을 쳤다”고 자신이 맡게 된 ‘영광에 넘치는 과업’을 소개했다.
 2) 내부 벽화 제작과 구성: 이쾌대는 우의탑에 부합하는 벽화의 주제를 구현하고자 “맑스-레닌주의 사상의 구현과 그의 생동한 표현으로서의 가렬한 투쟁 행정을 특히 조중 인민들의 심장을 울린 주되는 투쟁 모습들을 포착”하기 위해 세 가지 큰 구성으로 나눴음을 제시했다. 이는 좌측 벽면에 중국인미지원군의 출전시기의 내용을 다둔 <참전도>, 중앙 벽면에 3년간의 전쟁 시기를 다룬 <승리도>, 우측 벽면에 전후복구건설 시기의 <건설도>를 주제로 표현되었다. 특히 이쾌대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승리도>는 3년간의 전모를 담기 위해 탑 내실 벽면의 절반을 할양했다. <승리도>는 파노라마 형태로 좌측에 운산 전투와 장호진 전투를, 중앙에는 상감령 전투를, 우측에는 패전하고 후퇴하는 미군의 행렬을 담아 전쟁 승리의 기쁨을 화면 상단의 양국 군인으로 표현했다. 
3. 결론
1950년대 이쾌대의 작품 특징은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 번째는 월북 이전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뛰어난 인물화 역량이 월북 이후에도 드러난다는 점이다. 묘사력과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이쾌대의 작품에는 대상의 특징이 정확하게 형상되었으나, 사회주의적 낭만성이라는 틀은 이쾌대의 인물화 역량을 제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구 화면의 역동적인 구성, 인물의 생동감 등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는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두 번째는 이쾌대의 작품은 유화의 민족적 특수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쾌대는 각종 전람회에 정치적 소재보다 역사적 소재, 조선 고유의 전통, 인미의 생활 등을 소재로 한 작품을 출품했다. 특히 1959년 완공된 조중 우의탑의 벽화 <참전도>, <승리도>, <건설도> 은 이쾌대의 인물화 역량이 응축된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세 번째 발표자인 신수경(문화재청 평택항 문화재감정관실)은 ‘1950-60년대 북한 조각계와 월북 조각가들의 활동’에 대해 발표했다. 발표자는 북한 현대조각의 전개과정을 전후 복구시기와 사회주의 기초건설기인 1950년대, 천리마시기로 대표되는 1960년대로 나누어 시기별 특징을 살펴보았다.

1. 1950년대
월북 작가들이 조각계에서 펼친 구체적인 활동은 1940년대 후반부터 확인된다. 1946년 7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강원도 해방탑 건설준비위원회의 초청을 받고 북행길에 오른 조각가 조규봉과 김정수는 해방탑과 인민군 승리를 고취시키고 김일성 선전을 위한 수많은 초상 조각을 제작했다. 또 1949년 9월 평양미술대학이 설립되자 조규봉은 40여 년간, 김정수는 50여 년간 조각학부 교원으로 활동하며 조각가를 양성하고, 북한 조각교육의 기초를 다져놓았다. 이들 외에도 6.25전쟁 발발 직후 월북한 유진명, 이성, 이국전, 박승구 등도 북한 조각계를 이끌어 나갔다. 이들의 작품과 교육자로서의 활동은 월북작가들의 북한 내 활동에 대해 구체적을 살펴볼 수 있으며, 남북한 현대미술이 결국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음을 재인식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편 1950년대 초반까지 미술 창작에 대한 김일성의 구체적인 지침이나 교시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 북한의 미술가들은 소련의 문예이론과 실천에 의존해야 했다.
2. 1960-1970년대
천리마시기(1960-1970)은 1960년 ‘천리마 기수들의 전형 창조와 현대성 구현’이라는 김일성의 교시를 관철하기 위해 <천리마 동상>이 제작되는 등 당성과 계급성에 입각하여 사회주의 사실주의의 기치를 형상화 하는 것이 주된 목표가 되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소련의 절대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이른바 김일성 유일사상체계가 확립되면서 이전 시기 조각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1970년대는 <만수대 대기념비>(1972)를 비롯해 대형 기념 조각상들이 집체창작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 시기 활동 조각가들은 대부분 평양미술대학교를 졸업하고 유일사상체계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이는 소련 등 외부세계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으며 분단의 현실을 체험했던 1950-60년대 조각가들과는 차이가 있다.



네 번째 발표자인 이다솔(명지대학교)는 ‘월북 미술가 판화 연구: 김건중, 배운성, 손영기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발표를 진행했다.

1. 한국전쟁 이후 북한 판화계의 동향
북한에서 판화란, 소묘를 복제하는 여러 장르를 포괄하는 ‘그라휘크(graphic)’의 하위 장르 중 하나로 분류되었다. 1950년대 북한에서 판화의 역할과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언급한 사람은 정현웅이다. 정현웅은 편집위원으로 있던 ‘조선미술’에서 상업 미술로 출발했던 그라휘크가 일제의 착취로 조선의 경제가 무너지자 기반을 잃게 된 현실, 1953년이 되어서야 미술가 동맹 내에 그라휘크 분과가 설치되었던 열악한 상황을 지적했다. 동시에 그라휘크의 기반인 판화가 북한에서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던 현실에 개탄하며 뛰어난 판화가를 신속히 양성하자는 입장을 밝혔다. 1958년 ‘공화국 창건 10주년 기념 국가 미술 전람회’에 참석한 김일성도 선전 선동에 주목하면서 '특히 판화 부문이 크게 발전하기를 기대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처럼 사회주의 체재하에서 판화의 중요성과 판화가 양성 문제가 대두되자 1세대 판화가인 배운성, 손영기의 임무가 막중해졌다. 이에 배운성은 지도자로 활동하며 신인 판화가들의 성장을 독려했고, 손영기는 목판화 제작법에 대해 상세히 서술한 「판화 기법」을 『조선미술』에 3회 연재했다. 2세대 판화가인 함창연도 제작법에 대한 글을 수차례 연재하며 후세대 수학을 도왔고, 1960년대 후반에는 박태수, 홍범구가 이러한 역할을 이어받아 판화에 대한 기초 지식을 제공해나갔다. 이 밖에도 해외 전시에 주목하면서 모범으로 될 만한 해외의 작품을 소개하는 등 북한 판화계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1960년 ‘천리마 시대에 맞는 문학 예술을 창조하자’는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어떤 작품을 창작할 것인지 고민이 뒤따랐다. 이에 대해 최동수는 판화가 지닌 선전 선동성을 강력하게 호소, 당의 체제를 뒷받침할 수 있는 혁명적, 전투적 작품을 제작하자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북한에서 판화는 독립적인 순수미술로서는 발전할 수 없었고, 오로지 체제 선전의 영향력 아래에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월북미술가들의 판화
 1) 김건중: 김건중은 이론가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미술가동맹 소속 화가로서 시대가 요구하는 선동적인 이미지를 제작하는데 능한 작가였다. 대표적으로 천리마시대의 노동자를 주제로 한 <야금공들>과 혁명투사를 묘사한 <빨찌산 녀장군 김학실 장군>, <로흑산에서의 승리>로 뛰어난 실력의 판화가로 인정받았다.
 2) 배운성: 유화 등의 분야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은 미술가 배운성은 예술가이자 교육자로 판화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배운성은 현지 답사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의 자랑>, <위대한 힘> 등 천리마 시대를 반영한 판화를 제작하는 한편 <나들이> 같은 향토적이고 서정적인 작품을 통해 체재 선전의 울타리에 갇혀있던 북한 판화의 한계를 조금이나마 극복해냈다.
 3) 손영기: 손영기는 <용접공>, <3호 소성로 송구공들>을 통해 북한이 꿈꾸었던 미래에의 가능성을 그리고, <원쑤를 잊지말자>와 같은 사람들을 선동하는 강렬한 메시지를 지닌 작품을 제작해냈다. 

마지막 발표자인 김문경(서울역사박물관)은 ‘월북 미술가들과 출판미술: 대중성, 예술성, 선동성’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1. 해방기(1945~1950)의 ‘인쇄미술’
미술의 대중화운동, 대중을 위한 예술을 피력하며 특권계층의 향유대상으로서의 예술이 아닌, 기존의 틀에서 탈각하여 ‘액식미술’을 깨뜨리고, 이동이 용이하고 대중들에게 전달하기 쉬운 인쇄미술을 하자고 주장했다. 특히 최은석은 대중과의 긴밀한 결합을 위해 ‘문화 서클’을 조직할 것과 대량 생산성과 분포가 용이한 판화의 형식을 강조했다. 정현웅과 기웅 또한 인민대중들과 함께 생활하고 함께 호흡하는 창작 생활을 강조했으며, 특히 기웅은 빠른 속사로 인민대중의 피곤함과 짐을 덜어주는 평화로운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엄도만 또한 상업 및 산업미술가로 활동하면서 대중들의 이해 수준에 맞는 작품을 제작해야함을 언급했다.
2. 1950년대 북한의 ‘그라휘크 미술’
1950년대 북한의 출판미술은 ‘그라휘크’ 미술로 소련의 조형 예술 체계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특히 예술적 형상의 문제에 있어서는 리수노크(데생)이 강조되었다.
3. 1960년대 북한의 ‘출판미술’
최은석과 엄도만 등의 그라휘크 미술가들은 상승한 데생력을 바탕으로 북한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출판미술을 제작했는데, 특히 1960년대 당 정책의 관철을 위해 사용된 선전, 선동의 도구로서의 출판미술을 제작했다.  또한 이 시기는 ‘민족적 특성의 구현’이라는 당시 북한 미술계의 주요 화두를 출판미술계 내에서 심도 있게 접근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정현웅은 월북 이전부터 사용했던 민족적 소재를 다루면서도 북한의 현대적 미감과 당적 시선에 맞게 탈바꿈시킨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최은석은 다수의 삽화를 제작하면서 당시 주체적 국가로서 세워지기 위한 북한의 당적 방향과 민족적 특성의 구현이라는 문제가 점철된 역사화 삽화를 제작하면서 복직 고증의 문제에 접근했다.



심포지엄의 관계자, 발표자들이 모여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올해 5월에 개최된 1차 심포지엄이 월북미술가들에 대한 연구 성과를 점검하고 앞으로의 과제를 논의하는 자리였다면, 2차로 진행된 이번 심포지엄은 월북미술가 연구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북한미술연구의 기초 자료에서 나아가 원자료를 바탕으로 한 월북미술인 아카이브 구축으로 확장될 수 있기를 바란다.


원고작성 및 사진촬영 : 이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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