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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우리는 책의 시대 바깥을 상상할 수 있을까

송민호

작가 이상(본명 김해경, 1910-37)은 시 「명경」에서, “거울이 책장 같으면 한 장 넘겨서 맞섰던 계절을 만나련만 여기 있는 한 페이지 거울은 페이지의 그냥 표지” 라고 썼다. 거울이 책의 한 페이지였다면, 그것을 열어, 지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나’라는 계절을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거울이 책의 한 페이지였다면 말이다.

여기저기에서 책의 물성(物性)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는다. 책이 물건의 성격을 가진 것이라는,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이야기다. 본디 책이란 낱장으로 흩어지기 쉬운 종이의 한쪽 끝을 단단히 엮어 펼쳐서 볼 수 있게 만든 것이니, 물건이 아니었을 리 없다. 책을 구성하는 모든 것은 종이와 실이라는 실재하는 재료로 만들어져 있고, 양장의 코덱스라면 헝겊이나 가죽으로 표지를 감싸기도 한다. 책은 양손에 느껴지는 뿌듯한 감각으로 구성되는 부피와 무게, 질감을 가진 물건이다. 당연할 것도 뭣도 없다.

하지만, 책이 물성을 가진 것이라는 사실이 조금 새삼스럽다면, 지금까지 책을 물건 아닌 어떤 것으로 간주해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바로 말한다면, 개념이다. 지금까지 책이란 우리에게 공간을 차지하는 물건이 아니라, 책의 모습을 띤 사유의 형태를 상징하는 하나의 개념에 가까운 것이었다.



binding close up ⓒ pxhere


낱장의 종이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한쪽 끝을 실로 단단히 묶어두고 나니, 그 제본된 책의 낱장들 사이를 흐르는 어떤 시간의 흐름이 생겼다. 인간이 행했던 사유나 지식은 모두 이처럼 책의 첫 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 사이를 흐르는 시간에 맞는 형태나 질서를 가지게 된다. 본디 인간의 사유가 체계화 혹은 순서화 될 수 있는 것들만 존재할 리가 없지만, 책에 담길 수 있으려면 책의 목차가 표현하는 순서나 질서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페이지를 넘기며 사유는 발전되거나, 최소한 발전해나가고 있다는 환상이라도 연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책의 목차는 완결성의 감각을 결여한 것이 된다. 물론 ‘완벽한’ 목차가 주는 환상 같은 것도 존재한다.

어떤 책의 순서를 볼 때, 그 완벽한 균형감이나 질서를 느끼게 되거나, 추상적인 무시간성 속에서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감지하는 바로 그 순간 말이다.

파피루스나 양피지, 그리고 두루마리 형태의 종이에 담겨 왔던 인류의 사유와 지식을, 인쇄 문명을 통해 대량 인쇄할 수 있게 된 책이 시간적 흐름과 분절이라는 독특한 감각을 통해 이어받았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사유의 모든 형태들은 책에 담긴 이러한 연쇄나 질서의 감각을 본떠 순서의 미감을 구성해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책의 제목과 서문, 장절로 구성된 목차들, 그리고 그 장과 절들이 이루는 독특한 구성으로서 시작-중간-끝 내지는 기승전결, 혹은 옴니버스와 피카레스크, 이들은 우리가 모두 책을 통해 보아왔던 순서와 구성의 미감에 해당한다.

인간의 지식과 상상력은 본래 형태가 없는 것이지만, 책에 담기거나 담길 수 있는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것들이라면 책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미술전시에서 전시 타이틀과 서문, 그리고 섹션화된 구성과 그 사이를 흐르는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에서 우리는 책의 개념이 남겨둔 여전한 흔적을 발견한다.

우리는 지금 기나긴 책의 시대를 끝내고, 어딘가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시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글쓰기가 중심이 되었던 문학은 당연하고, 미술전시의 형태나, 음악회의 구성, 대학의 강의 또한 바뀌어 갈 것이다. 우리는 과연 책의 시대 바깥을 상상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작가 이상이 그랬듯, 거울면을 열어 맞섰던 계절을 만나기 위해, 어쩌면 이제 책의 시대 바깥을 상상할 만한 장소가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 송민호(1975- ) 문학 연구자. 개화기 한국의 문학과 어문에서부터, 문학 텍스트와 시각적 이미지 사이의 관계, 미디어와 지식, 권력과 문학 등 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주제에 대해 공부하고 있음. 『이상(李箱)이라는 현상』, 『언어문명의 변동』 등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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