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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작품과 미술가의 재발견

전유신

1.
최근에 서점에 들렀다가 표지에 실린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293호 열차 C칸>에 눈길이 가서 펼쳐보게 된 책이 있다. 표지 그림으로 사용된 호퍼의 작품처럼 책이 등장하는 그림들을 주제로 하되, ‘과연 그림 속 저 책은 무슨 책일까?’라는 궁금증을 해결해 나가는 내용이었다. 책의 표지나 내용이 상세하게 그려진 작품들도 있었지만 배경이나 소품 정도로만 존재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이어서, 작가나 작품에 대해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저자의 상상력을 가미해 그 책의 내용을 추정한 경우가 많았다.



이종우, 독서하는 친구, 1926, 캔버스에 유채, 62.6×51.3cm,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이종우의 작품인 <독서하는 친구>를 예로 들어보자. 1925년에 프랑스에 진출한 도불(渡佛) 작가 이종우가 1926년에 그린 이 작품은 같은 시기에 독일에서 유학했던 친구인 안재학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각각 유학 중이었던 이들이 파리에서 간혹 조우했다는 사실은 1927년에 도불한 나혜석을 두 사람이 함께 마중하러 나왔다는 그녀의 증언을 통해서 확인된바, 저자는 이 그림 속 주인공이 안재학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었다. 그가 읽고 있는 책은 그림의 좌측 하단에 측면의 일부가 그려져 있을 뿐 내용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 책을 불어판 『춘향전』으로 설정하고 이종우와 안재학이 이에 대해 나눴을 법한 가상의 대화를 통해 그 내용을 소개하고 있었다.

관련된 자료들을 근거로 작품을 둘러싼 배경적 맥락을 충실히 소개하면서도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글쓰기를 가르쳐온 저자의 이력 덕분인지 문학적 상상력의 영역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그 상상력이 기발함과 과도함 사이를 오가는 관계로 진폭이 매우 크기는 했지만, 그것의 밑바탕이 된 저자의 호기심 덕에 독자들로서는 익숙한 그림들을 새로운 관점으로 또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주제의 그림들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2.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전시되고 있는 ‘절필시대:정찬영, 백윤문, 정종여, 임군홍, 이규상, 정규’전을 보다가 문득 앞서 언급한 책을 떠올렸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6인은 일찍 창작 활동을 중단했거나 주류 화단의 관심사로부터 비껴간 이유 등으로 인해 그동안 제대로 조명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던 작가들이었다. 이들은 마치 한 구석에 작게 그려져 있거나 배경 정도로만 인식되었던 그림 속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미술사에 존재했던 작가들이라 할 수 있다.




정찬영, 한국산유독식물(韓國産有毒植物), 1940년대, 종이에 채색, 107.5×76.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6인의 작가 중 한 사람인 정찬영의 경우만 보아도 조선미술전람회의 동양화부에서 최초로 여성 특선 작가가 되는 등 1930년대 내내 선전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지만, 결혼한 뒤로는 식물학자인 남편을 위해 식물도감용 세밀화를 제작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개인적인 작업을 더는 이어가지 못하게 된다. 이처럼 화가로서의 활동을 일찍 접은 탓에 그녀의 생애와 작업에 대한 연구 또한 극소수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정찬영의 경우처럼 한국 미술사에서 가끔씩 스쳐 지나가듯 보았던 작가들의 행적을 추적하고 그들의 창작활동을 복기해내는 작업이 이 전시를 계기로 시작된 것이다. 관심의 대상으로부터 조금은 멀어져 있던 이 작가들을 재발견하기 위해 마련된 이 전시가 근대 미술사의 공백을 채우고 동시에 이를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가능성의 지평을 다각도로 여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 전유신(1975- )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박사 졸업. 대전시립미술관, 아르코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역임. 고려대, 이화여대, 중앙대 강사 재직. 『한국 동시대 미술 1990년 이후』(사회평론, 2017), 『키워드로 읽는 한국 현대미술』(사회평론, 2019) 등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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