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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필라델피아 반즈파운데이션 “예술에 미친 사람들을 위한 6백만 불짜리 사원”

박파랑

가령 25달러의 입장료를 내기만 하면 언제든지 들어가 관람할 수 있는 곳, 이것이 근대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정착된 미술관의 모습이다. 그마저도 비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은 1달에 하루 무료입장이 가능한 특정 시간대에 인산인해를 이루는 미술관의 모습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뉴욕 같은 곳 이야기이다.



반즈파운데이션

그러나 반대로 25달러를 내는 것으로 관람을 “허락” 받는다는 사실이 감지덕지한 경우도 있는데, 바로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반즈파운데이션(Barnes Foundation)이 그곳이다. 1899년 불과 27세의 나이에 아르지롤이라는 신약을 개발해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알버트 반즈(1872-1951)의 컬렉션으로 이루어진 미술관이다. 1925년 처음 이곳이 문을 열었을 때 사람들은 먼저 사전예약 편지를 써야했고, 짧지 않은 시간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허락받는 것은 아닐뿐더러 그마저도 거절로만 끝난다면 감지덕지다. 일진이 사나우면 비서의 이름으로 작성된-실은 반즈가 직접 쓴- 세상에서 가장 불쾌하고 시니컬한 거절의 답장과 마주쳐야 될 수도 있다. 덕분에 미국 자동차 업계의 거물 월터 크라이슬러나 유명 작가인 T.S.엘리엇 같은 명사들은 미술관 문턱도 밟지 못했다. 까짓 것 안보면 된다고 돌아서기엔 컬렉션 규모와 수준이 어마어마하다.

르누아르 작품이 181점, 세잔 69점, 마티스 59점, 그리고 피카소의 작품이 46점에 달한다. 소소하게 10여 점씩 가지고 있는 작가들-가령 루소, 모딜리아니, 드가 등-은 뺐다. 별거냐고? 별거다. 이 수치는 현재 세계 메이저급 미술관 수준의 것인 데다가 퀄리티는 그 이상이다. 당시 미국 내 마티스의 작품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던 인물이 반즈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시기가 프랑스 모던아트가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던 1920년대 미국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욕하기엔 이르다. 필라델피아 하층민. 낮에는 정육점에서 밤에는 야간 경비원으로 생계를 이었던 노동자 부모 밑에서 자란 반즈는 대신 일반의 평범한 시민들, 학생들, 노동자들에게는 순순히 문호를 개방했다. 그는 그 어떤 비평가, 이론가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오직 자신의 잣대로 파리를 오가며 작품을 직접 사들였다. 괴팍하다고 소문난 그의 성격을 둘러싼 에피소드는 차고 넘치며, 덕분에 드라마틱한 컬렉션 뒷이야기도 제법 전해진다.

가령 에콜 드 파리 시기 작가 중 하나인 샤임 수틴은 극악한 빈곤에 시달리던 어느 날 자신의 작업실에 들이닥친 한 미국인 컬렉터의 미친 짓 덕분에 인생 역전에 성공한 인물 중 하나이다. 반즈는 그 자리에서 21점을 한꺼번에 사들였는데, 반즈의 총아가 된 덕분에 수틴은 호텔에서 지내며 벨보이, 요리사, 메이드 등을 그리는 부르주아(?) 화가가 되었다. 무엇보다 빠트릴 수 없는 기행은 작품의 디스플레이에 관한 것이다. 도널드 저드는 “현대미술작품 중에는 어느 특정한 장소에 전시해야 하고, 절대로 옮기지 말아야 하는 작품이 있다”고 했다는데, 반즈는 일찌감치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한 듯하다. 반즈파운데이션의 방대한 양질의 작품들은 일반적인 미술관들의 분류-시대별, 사조별, 혹은 지역별 분류-와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설치되었다. 각각 별도의 전시실을 꾸미고도 남을 세잔과 르누아르의 작품이 끝없이 섞여 있고, 르누아르의 가족 초상이 고전 종교화와 세잔의 풍경이 고딕의 십자가 책형과 섞여 있는 식이다. 언뜻 보기에도 계보가 엉망인 이 특이하고 기괴한 방식을 그는 “앙상블”이라고 명명했다. 그 앙상블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세부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으나, 미술사나 미술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 없이도 시각적 연관성을 통해 그림을 보고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좋은 미술품과 함께 생활하며 이를 공부하는 것은 인간에게 알려진 그 어떤 즐거움보다 한층 더 대단한 흥미와 다양성 그리고 만족을 제공한다”고 믿었던 그는 까탈스러운 성미에 맞게 죽기 전 길고 긴 계약서를 작성했다. “모든 그림이 기증자의 생전에 위치했던 장소, 정확히 그곳에 있어야 한다”는 문구가 명기된 위탁 계약서는 그의 사후 벌어졌던 긴 법정 소송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지켜졌다. 덕분에 현재 미술관은 1951년 그의 타계 이후 그가 생전에 설치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 박파랑(1973- ) 홍익대 예술학과 및 동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졸업.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고려사이버대 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 역임. 현 홍익대 문화예술교육원 전임 강사 및 서울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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