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숙
이우환(李禹煥)을 사기꾼으로 몰아 붙이는 사람들이 많다. 일반인은 그렇다 치고 제법 미술가행세를 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그렇게 막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막말의 근거는 이렇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고 점이나 선을 몇개 그리고서는 억대의 돈을 받아 챙기는 화가라는 것이다. 그러니 미술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의 인식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이런 심리에는 다분히 질투심이 뒤엉켜 있다. 현대미술의 텍스트가 사라지면 결국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돈과 연결된다. 간단히 점을 몇 개 찍고는 억대의 돈을 버니 질투심이 일어날 수밖에. 결국 그는 최근 천경자의 뒤를 이어 기어이 위작 시비에 휘말리고 말았다. 돈이라는 괴물이 그의 가랑이를 휘어잡은 것이다.
1978년 동아일보가 기획한 대담 프로그램에서 이우환을 처음만났다. 오래된 일이어서 그때 담론한 구체적인 주제가 정확히 떠오르지 않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현대미술과 현상학(現象學)이었던 것 같다. 이우환은 화가인 동시에 이미 일본에서 널리 알려진 미술비평가의 한 사람이었다. 이미 『만남을 찾아서』라는 비평서가 우리의 화단에도 알려져 있었던 참이었다. 어쨌든 그 일이 있은지 얼마 뒤 이우환의 연락으로 우리는 광화문의 어느 다방에서 만났고 그는 일본으로 돌아간다면서 나에게 만남의 기념이라고 하면서 소품 한 점을 주었다. 소품은 스케치북 한 장에 진한 묘필로 위아래로 휘는 토막 선을 반복적으로 그은 다음 문질러서 수묵(水墨)효과를 낸 것이다. 선은 세 개씩 세 줄로 나누어 모두 아홉 번 그었는데 첫 줄은 두번 위로 휘고 끝 선을 피리어드를 찍듯이 멈추는 드라마를 연출한다. 두 번째 줄은 선이 아래위로 번갈아 뒤집힌 다음 피리어드를 찍었고 마지막 줄은 첫 줄처럼 위아래로 휘고 피리어드 드라마를 연출한다. 피아니스트가 소리가 나지 않는 건반을 두드리는 제스처처럼 느껴진다. 이우환은 언젠가 필자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런 문장을 남겼다.
“한국에서는 저의 그림에 대해 민중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테-마를 잃은 그림이란 얘기를 들었지만 저는 아직도 그놈의 테-마라는 것을 좀 더 깨트리고 씻어버릴 수 없을까 하고 노력 중이랍니다.”
그가 소품에다 제목을 달지 않았던 이유이다. 물론 이 그림에는 우리 가족끼리 부르는 제명이 있다. <눈썹>이다. 학교에서 갓 돌아온 어린 딸이 그 그림에다 붙인 이름이다. 문제는 화제(畫題)가 왜 있어야 하는가이다. 현대미술에서는 일상언어를 소거(消去)하기 위해서 엉뚱한 숫자나 알파벳을 자의적으로 결합하여 제목으로 쓴다. 백남준의 정의를 빌자면 ‘사기 치는 일’이다. 어쨌든 나는 이렇게 해서 아홉 개의 선을 그은 이우환의 그림 한점을 가지게 되었다. 점 하나가 억대의 돈이면 도대체 이 소품 한점은 얼마나 되는가. 나로서는 정말 놀랍고도 흥미로운 일이 아닐수 없다. 어찌 어찌해서 어느 지인의 도움으로 소품을 감정에 의뢰해 보았다. 결과는 흥미롭다.
“진품이라고 하더라도 유화(油畫)이면 1천만 원 상당, 하지만 화선지 작품이어서 500만 원 정도. 그렇지만 이 작품에는 화제( 畫題)가 없다. 실제로는 거래 불능.” 우리가 회화작품을 보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값을 매기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작품에 화제가 없어서 거래 불능이라는 판단이다. 현대미술에서 화제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 깜깜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그 테마라는 것을 깨뜨리려고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 화가이다.
테마를 지운다는 것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말한다. 아니 테-마를 지우기(消去) 위해 그림을 그린다니 그러려면 애당초 붓을 들지 말아야 하지.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말이 어디 가당키나 하나. 사기를 치려면 백남준처럼 제대로 치라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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