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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모네의 아름다운 마무리가 의미하는 것

안문훈


모네, 수련, 1917-19, 캔버스에 유채



모네(Claud MONET)는 인상파의 대표적인 작가로 한동안 그 그룹의 대표를 맡아 모임을 이끌었다. 모네의 작품 제작량은 매우 많은데 수련 연작 외에도 인물화, 정물화, 일반적인 풍경들도 많이 그렸다. 그중에서도 70대후반부터 집중적으로 그린 수련 연작이 모네의 회화를 대표한다.

모네는 자신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고 경제적으로 풍족해지면서 이런저런 실험들을 자유롭고 대담하게 할 수 있었다. 
그는 파리에서 100여km 떨어진 지베르니 마을에 널찍한 아틀리에를 만들어 놓고 화실 옆에 커다란 연못을 만든 후 강물을 끌어들였다. 연못 주위에는 각종 화려한 꽃들을 심었으며 버드나무도 몇 그루 심었다. 

그것들이 물그림자를 드리우고 하늘과 하늘에 떠 있는 흰 구름도 연못 속으로 들어와 분위기를 한껏 돋우었다. 이후 모네는 수련그림에 열중했는데 색깔을 혼합하기보다 단색을 힘있게 터치하여 각 색깔의 터치가 하모니를 이루도록 했다.

모네가 그처럼 힘있는 터치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인상파가 대두될 무렵 나오기 시작한 납작 붓(Flat brush) 덕분이었다. 
이 붓은 주로 돼지 등쪽에 난 뻣뻣한 털을 묶어 얇은 철판으로 싼 것으로 오늘의 작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이다. 동양화에서 산수를 그릴 때 서양화의 ‘터치’에 상응하는 ‘준법(皴法)’이 있다. 

모네의 터치는 하엽준(荷葉皴)과 닮았다. 하엽준은 ‘모양이 연잎 줄기처럼 이리저리 갈라지며 구성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모네의 터치가 동양문화에 심취하면서 얻은 아이디어일 수도 있다.

모네는 말년에 심각한 역경을 만나게 되었다. 노쇠해지면서 백내장이 심해진 것이었다. 주위에서 안과수술을 권했지만, 모네는 혹 수술이 잘못될까봐 선뜻 결심하지 못했다. 결국, 작업을 계속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세 차례의 수술을 했는데 그는 수술 중간에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색을 전혀 분간할 수 없어 튜브에 번호를 매겨 식별하도록 했다는데 이 시기의 그림을 보면, 원색의 색깔이 뒤엉켜 싸우는 듯하다. 모네는 그런 악조건 속에서 최후의 대작 여덟 점을 연작으로 완성했다. 동그랗고 두꺼운 이중 안경을 쓰고 그리던 그의 작업 사진을 보면 운명과 싸우는 그의 ‘기’가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1918년 제1차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그의 조국 프랑스는 전승국이 되었다. 많은 이들의 엄청난 희생을 통해 되찾은평화였으나 화가로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 모네는 친구이자 당시 프랑스 수상이었던 클라망소에게 작품기증을 제의했다.

이를 통해 그의 신앙과 정의감, 그림 속에 자신을 함몰시키지 않고 인간과 사회와 국가를 따뜻한 시선으로 품는 모네의 내면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 모네의 모습을 보면서 몇 년 전 작고하신 풍속화가 혜촌 김학수 선생의 모습이 오버랩 되곤 한다. 선생은 북녘의 가족들을 두고 평생 수절했는데 내 자식만 자식이 아니라는 신념으로 50여 명을 친자식처럼 길러냈다. 92세로 생을 마감하던 해까지 세필 작업을 하여 그 해 5월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있었던 후소회전에 작품을출품하였다. 

근면하기 이를 데 없었던 선생은 다작하면서 연세대,인제대, 경민대 용인순교자기념관 등에 수십 점씩의 작품을 기증하여 지금도 그분의 작품을 대할 수 있다. 그런 모범적인 생활로 인해 인제대, 경민대에서 수여하는 인성대상을 받기도 하였다.

‘어떻게 나온 작품인데 작품을 그냥 줘?’라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산고의 과정을 거쳐 나오는 작품임을 생각할 때 일리가 있다. 그러나 모네나 혜촌 선생의 경우를 보면 그것이 아니라 생각된다. 사실 예술작품은 문학 음악 회화를 불문하고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존재한다. 내 화실, 내 미술관에 걸어놓고 나와 지인들만 보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등불을 켜 됫박으로 덮어 놓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작품기증은 재능의 사회환원이고 적극적인 나눔과 사회참여이다.

최근 모네의 기증작품으로 꾸며진 오랑주리미술관에 가보았다. 40여 미터 둥근 벽면을 돌아가며 장식한 두 개의 방에 걸린 그림들을 보며 숙연함이 느껴졌다. 나 역시 쇠약한 눈 탓으로 조심조심 작업을 이어왔기 때문이기도 하였으리라. 그런데 색채가 생명인 모네의 작품이 희끗희끗해져 있어서 조금 안타까웠다. 

예술이 장구하다지만 천만년 이어질 수 없다는 것, 다만 작품 속에 고상한 의미와 정신들을 새겨두어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된다면 작품은 그로써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예술이 인생 전부라는 집착에서 벗어나 훨훨 자유롭게 예술을 즐기고 지베르니의 연못에 담겨있는 하늘의 이치와 하늘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안문훈(1951- ) 후소회, 양평미술협회 회원. 개인전 18회. 미술관련 저서 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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