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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직지와 동시대 예술가들의 만남

김승민



윌리엄 켄트리지, Notes Towards a Model Opera, 2014-15


아주 추운 겨울날 청주를 처음 방문했다. 제1회 직지코리아 국제페스티벌 전시감독의 제안으로 만난 직지는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에 인쇄된현존하는 최고 금속활자본이다. 아직도 기억나는 그 추운 날, 고인쇄박물관에서 직지의 제작과정을 보며 금속활자는 예술성과 과학이 결합된 창작이란 걸 알았다. 그리고 지난 9개월간 과학, 건축, 디자인, 물리학, 미술, 언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장르의 고수들께 조언을 얻고 직지에 영감을 받은 작업들이 탄생하는 것을 목격했다. 디자이너들은 “어! 직지는 그 당시 디자인이네!”라고 했고 과학자들은 “당대 최첨단 기술이네!”라 했다. 페스티벌의 주제전시 ‘직지, 금빛 씨앗’전은 이런 다양 장르 속 직지의 해석을 담고, 금속활자가 그랬듯, 필자에겐 무궁무진한 영감을 주는 또 하나의 씨앗이었다.


사실 서양권 대부분이, 구텐베르크 성경이 최초로 금속활자를 사용해 인쇄되었고, 특권 소수 층만 공유했던 정보를 공유케 하여 종교혁명부터 르네상스, 과학혁명까지 촉진시켰다고 배웠다. 구텐베르크보다 78년이나 앞선 고려의 금속활자는 왜 알려지지 않은 걸까? 이것만으로 직지가 세계사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고민하던 중 저명한 독일학자분을 만나게 됐다. 그는, 미국 전 부통령 앨 고어가 방한 때 이야기한 ‘한국이 구텐베르크에게 금속활자 기술을 전해줬다는 단서를 스위스인쇄박물관에서 검증받았다’고 했던 일화를 내게 듣고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기술을 어디선가 배웠을 것이라는 가정은 일리가 있다고 말했다. “구텐베르크는 비즈니스맨이었거든. 그는 성서 이전에 면죄부로 돈을 많이 벌었어. 성서를 찍기까지 시간도 없었고, 어디선가 금속활자를 보고 응용했을 가능성이 커”


그날, 씨앗이 생각났다. 고려에서 주머니에 담은 조립형 금속활자가 누구에게는 그냥 지나친 철 조각이었을 때 다른 누구에게는 가능성의 씨앗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람에 따라 예상치 못한 곳에 닿은 씨앗이 연상됐다. 씨앗을 크려면 태양이 필요한데…. 라고 생각하다 보니 무릎을 딱 치게 됐다. 태양, 그래 날일자(日)! 날일자는 조립식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는 굉장히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직지 하권에는 날일자가 아래위가 뒤집어진 채로 3번이나 찍힌 것이다. 날일자를보면, 위아래가 비슷한지라, 판형틀에 금속활자 하나, 하나 조립해 나갔을때 실수를 했던 것이 오늘날 세계사를 뒤집는 단서가 되었다. 오탈자에서 찾은 그 해답도 재밌고, 하필 날일자임이 더 흥미롭다. 태양을 머금은 직지라? 그렇게 금속의 금빛, 불가능을 꿈꾸는 연금술상의 금빛, 그리고 태양의 금빛을 따서 금빛 씨앗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필자가 실제로 전시기획 과정에서 론 아라드, 세미컨덕터, 료이치 쿠로카와 등에게 당신이 이번 전시에 꼭 참여해야 한다고 설득할 때 했던 설명이다. 금빛 씨앗, 그것이 세상을 바꾼 많은 이들이 꾸는 꿈이다. 실수가 단서가 되는 역발상적인 생각으로 한쪽으로 쏠린 세계사를 다시 묻는 그런 첫 전시를 같이하자는 건 진심이었다.


존경하는 윌리엄 켄트리지의 작품 중 메트로폴리탄오페라에서 감독한 오페라 작품 <The Nose>와 <Notes towards a New Opera>도 이번 전시에 포함되어 있는데, 그 명분은 정확하다. 씨앗의 단면도를 곰곰하게 보면 떡잎이 되는 새싹 외에도 뿌리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씨앗을 생각할 때 뿌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전시는 크게 새싹으로 딱딱한 외피를 뚫고 나와 세상의 다양한 가지를 친 구텐베르크적 세계와 그 이후를 조명하며, 우리가 지나치는 뿌리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패러다임의 형성과정의 내면을 보는 작업들과 과거를 새롭게 조명하는 것, 새로이 우리 아티스트가 창작하는 이야기로 마련되어 있다. 한쪽으로 치우친 역사관을 다시 보는 것 또한 윌리엄 켄트리지가 오랫동안 작업한 맥락이다. 사람들이 달을 보며 해를 떠올리지 않는 것처럼, 오탈자가 나쁘다고만 생각하는 것 처럼.. 직지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금빛 씨앗으로 단순히 한국작가에게 국한된 소재가 아닌 세계인의 것이었으면 한다.




- 김승민(1980- ) 소더비 예술사 학사, UCL 미술사 석사, RCA 큐레이팅 박사중. 한국현대도자영국특별전(2006), 리버풀비엔날레 한국관(2010, 2012), 한영수교130주년 ‘어느 노병의 이야기’전, 유네스코 파리본부 미디어전(2013),KBEE 한영미디어아트전(2013), 베니스비엔날레 병행전시 ‘베니스, 이상과 현실사이’(2015) 등 다수 국제전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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