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170)볼만한 그림은 그림 너머에 있다?

김을

5-Beyond the painting 14-7, mixed media, 185.5×231×14cm


158-Untitled, 2012, mixed media, 93×68×8cm


나는 진정한 작자(作者)인가. 나는 작자로서 부끄러운 일은 없었는가? 나는 가끔 이렇게 나 자신을 의심하곤 한다. 오래전 이야기 하나…. 나는 지금까지도 인물화에서 코를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지라 예전엔 자격지심이 생겨 내심 고민스러워했던 적이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이를 못마땅히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의심인즉슨, 명색이 작자로서 오랜 세월을 그림과 함께 살아왔는데 언제부턴가 그림에 대해서 모종의 회의감과 함께 불편한 감정이 생기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작금에 이르러 그림이란 놈이 제 세상을 만난 듯 온갖 형상과 이미지를 쏟아내 미적 포화상태에 이른지라 그림 그리기가 사실 여간 고민스러운 일이 아닌 데다가 누구나가 그렇듯 내 몸 역시 작은 우주 일진데 그 넓은 곳에서 무얼 하나 추려내어 집중적으로 그려내야 하는 게 여간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정신이나 사물의 형상을 화면에 드러내어야만 그림인가? 같은 잡생각들이었다. 그림에 누를 끼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가 없지 않았지만 허나 이런 생각들이 그리 비관적인 상황으로 흐른 건 아니었고, 문제라고 한다면 그림이랍시고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심상이나 형상을 집어넣는 행위가 무의미하고 부질없다는 불손한(?) 생각이 자꾸만 나의 뇌리를 스치고 있다는 점이었다.
 
캔버스 표면에 반드시 무언가를 그려 넣어야만 그림이라 할 수 있는가? 구태여 습관적으로 그리는 행위를 거치지 않고도 그림이 되는 묘수는 없는가? 등의 잡생각으로 그림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하는 의지만은 잃지 않고 있었다. 다행히 예부터 우리 동양에서는 그림을 논함에 있어서 대상의 모든 것을 세세히 드러내기 위해 종이 위에 온갖 형상과 기교를 드러낸 그림은 그 격이 지극히 낮은 것으로 치부하였고 화자(畵者)와 대상 사이에 인공의 티가 없고 기교가 드러남이 없이 저절로 표현된 듯 자연스레 드러난 그림이 상품이라 하여 굳이 인공적인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도 격조 있는 그림이 가능하다는 놀라운 미적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런 동쪽 옛사람들의 심미관에 힘입어서 어떤 두려움이나 주저함을 갖지 않고 그림에 대한 생각을 조심스레 발전시키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 형상의 기만과 난무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던 터라 그림에서 형상을 배제하고자 애쓰고 있다. 사실 작금에 형상(드러냄)이 난무하는 그림의 표면이 질리지 아니한가. 형상의 배제는 어느 정도 진전이 있으나 빛은 아직 배제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 나는 이제 그리기를 떠나서 그림의 공간에 물리적으로 다가서고 있다. 그림의 물리적 공간을 살펴보자면, 일단 그림의 표면은 형상이 배제되어 비어있는 채로 그림 뒷면의 어두운 공간이 그림의 본체라 할 수 있는데 이 텅 비어있는 본체 공간은 캔버스의 표면 공간과 유리창으로 연결되어있는 구조이다. 여기에서 창은 미적 행위가 아닌 뒷면의 미적 세계로 관자를 유인하는 표지에 가깝다. 비록 구조적 형식은 간결하지만 무한한 미적 교감이 가능한 구조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그림 표면에 또렷한 형상으로 보이는 창은 사실 형상이 아니다. 어두운 본체의 공간에 이르는 물리적 통로 혹은 그 기호일 뿐이다. 따라서 이 <Beyond the painting> 시리즈 작품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림을 만든다고 해야 할 것이다. 속성상 그림의 표면은 인위적으로 가공된 꾸며진 세계이지만 표면 너머 뒤쪽의 본체 공간은 꾸미기 이전의 공간, 미처 표면에 드러낼 수 없거나 드러내지 않은 진실의 공간이면서 온갖 상상을 담아낼 수 있는 무한의 공간이라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하자면, 화자는 절대로 그림의 표면에 진실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 법이니 그림의 표면이나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그림 이면에 숨겨진, 보다 볼만한 진실의 세계를 음미해 보라는 뜻이리라.

앞으론 또 바람이 일듯 자연스럽게 무슨 엉뚱하고 불손한 생각들이 내 몸을 스쳐 갈지 기대해 본다.


- 김을(1954- )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 졸업. 2016 올해의 작가(국립현대미술관), 스페이스몸미술관(2017, 청주), 초이앤라거갤러리(2017, 독일), 백아트(2015, 미국 LA) 등 개인전 23회. 『MY GREAT DRAWINGS』 등 드로잉 작품집 8권 출판.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