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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국화 존중과 우리의 미래

정종미

정종미, <어부사시사(적)>, 2010, 한지에 안료, 염료, 공댐기법, 60×90cm


한 국가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지닌 그림을 ‘국화’라고 한다. 조상들의 그림 방식을 그대로 보전하거나 재료 기법적 방법이 유사하면 그렇게 명칭할 수 있다. ‘국화’라고 명할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한국의 그림 즉 ‘한국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 우리와 유사한 문화 의식을 지닌 일본이나 중국 역시 자국의 전통을 잇는 그림을 ‘국화’ 혹은 ‘일본/중국화’라고 부르고 있다. 도쿄예대의 경우 회화과는 ‘일본화·유화·판화·벽화·유화 기법’으로, 칭화대 회화계도 유사하게 ‘중국화·유화·판화·벽화·재료 기법’으로 나누고 있다. 베이징중앙미술학원도 ‘중국화’를 다른 회화 장르와 별도로 설치하여 전통미술 계승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중일의 경우와 달리 우리는 우리 그림 즉 ‘국화’에 대한 국가적 인정이나 제도적 장치 등이 취약하다. 정통성을 지닌 그림으로서 자부할 수 있는 국화의 역할은 찾아보기 힘들고 서양으로부터 유입된 유화 등에 밀려있는 상황이다. 국립 한예종의 경우도 음악원은 국/양악으로 나뉘는데 미술원은 국/양화로 나누어져 있지도 않거니와 국화 수업이 한두 개 개설되어 있을 뿐이다. 이는 전국적인 현상으로서 대학구조조정·통폐합 등으로 가속되어 국화의 영역은 매우 미미할 따름이다. 위에서 보듯이 중일의 특징은 첫째, ‘국화 존중’이고 둘째, ‘재료기법 중시’이다. 전자의 이유라면 국화가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자신들의 DNA이고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 척도이다. 국화 존중은 자문화·전통에 대한 인정·존경이고 정체성에 대한 천착이며 결국 자존적 근거가 된다. 도쿄예대 유화과에서는 서양회화의 전통도 철저히 가르친다. 습식벽화로부터 템페라와 유화의 단계까지 섭렵하며 역사적 계통과 재료기법을 습득함으로써 현대적 창작으로 나아가게 한다. 유화의 현재라는 단면만 제시하거나 수성이라는 이유로 아크릴화를 ‘국화’와 혼·남용하는 우리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후자의 이유로는 미술이란 ‘형태·색채미’를 바탕재·물감·전색제라는 ‘물질’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므로 이것에 대한 이해가 가장 우선하기 때문이다. 재료 기법적 지식이 결핍되면 회화의 미적·보존적 완성이 불가하고 나아가 미술적 감동이란 부재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상황이 이들과 다름에 대해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아마도 조선말과 근대기의 왜곡된 역사적 트라우마가 원인은 아닐까? 외래미술 의존성이 높은 데다 자국의 역사문화 계승의 국화가 건강·건재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독도는 우리 땅’인데, ‘국화는 우리 그림’이 아닌 이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동경예대의 디자인전공의 교수는 7인인데 이들 중 2인이 일본화 전공자이다. 번거롭고 불편한 일이지만 기초과정에서 전공자들은 일본화를 열심히 배운다. 자국을 모르면 세계적 디자이너는 없으므로. 걸출한 디자이너를 배출한 일본의 디자인 교육이 이러한데 우리는 여전히 ‘국화 무시’를 표방할 것인가?

애플의 잡스는 아이폰의 터치 촉감을 좋게 하려고 기술자들에게 서예를 가르쳤다고 한다. 우리에겐 쓸모없는 것이 그들에겐 인프라가 된다. 한국에선 한동안 디자인 서울을 내걸면서 디자인 열풍이 불었고 국가 생사가 걸린 것처럼 디자인 바람이 대단했다. 한국디자인이 융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IF 디자인협회장 랄프 비그만(Ralph WIEGMANN)의 ‘한국 디자인은 아직 없다’라는 말은 마음에 새길 일이다. 국가 경쟁력 재고를 위한 한국적 디자인이 요구되고 이를 위한 정체성이 절실한데 아직은 없다는 뜻이다. 정체성 확보를 통해서 한국적 디자인이 가능하도록 하려면 ‘전통 중시’과 더불어 ‘국화 존중’이 전제되어야 하지 않을까?
 
과거를 무시하면서 미래가 완전하기를 기대할 수 있는가. 전통을 무시하고 현대가 건재할 수 있는가. 뿌리가 약한데 꽃과 열매가 실할 수 있는가. ‘국화 건재’는 문화전쟁의 시대에 주요 인프라로 작용할 것이며 디자인 등의 산업에도 동력을 제공하여 궁극으로는 국력 신장의 기반이 될 것이다. 우리는 ‘국화’를 제대로 이해·완성함으로써 우리의 존재 방식에 대한 깨달음·확신을 얻을 수 있다. 나아가 식민지와 전쟁이라는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 우리를 자유·자존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삶은 고양될 수 있다.


- 정종미(1957- ) 서울대 미술대학 학사·석사. 고려대 부설 색채연구소장. 개인전 22회, 단체전 150여 회. 제13회 이중섭미술상(2001) 수상, 제13회 이인성미술상(2012). 『우리그림의 색과 칠』(학고재출판사, 2001) 지음. 현 고려대 디자인조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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