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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내가 즐겨그린 군중의 시작

이상원

여름날, 2013, 종이에 수채, 224×1092cm 


군중, 2015, 캔버스에 아크릴, 200×350cm


충청남도 공주에서 청양방향으로 고속도로를 타고 20여 분을 달리다 보면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칠갑산 부근을 지나게 된다. 나는 그 칠갑산 자락 깊숙이 자리한 정산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5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왕복하며 학교를 다녔고 내 유년시절은 그렇게 한적한 산골마을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와 밤하늘의 은하수로 기억에 남아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이사했을 때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어디를 가나 붐비는 사람들이었다. 대학 시절 학교 가까이에 있던 한강시민공원에서 매일같이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림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한 흥미로운 풍경이었다. 성산대교 위에서 내려다보는 한강시민공원은 날씨가 따뜻한 휴일이면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여름이 되면 난지도 방향의 야외 수영장에 수만 명의 사람이 물놀이를 즐겼다. 2000년대 중반 주5일근무제가 시작될 무렵부터 휴양지에는 더 많은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다. 그즈음 즐겨 다니던 스키장이나 산, 바다 등 어디를 가나 눈에 들어오는 것은 군중이었다. 나는 그 인상적인 풍경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그려낼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광활한 풍경을 회화로 표현하기 위해 나는 200호 이상의 큰 캔버스에 작은 사람들로 구성하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 시점이나 옆으로 길게 확장되는 파노라믹시점의 그림을 주로 그리게 되었다.
나는 그림 안에 가족, 연인, 친구들과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우리의 모습을 최대한 열심히 관찰하고 자세하게 그려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개별적인 모습들이 군중으로 그려지면 느낌이 많이 달라진다. 사적인 취향과 개인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여가의 본질이 대량화, 대중화, 획일화되어 나타나는 아이러니한 모습은 나에게 현대인들의 자율적인 관념과 존재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져왔다. 개개인의 추억들이 공공의 기억이 되어 일정 주기에 따라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그리고 이러한 패턴은 이제 지역, 문화, 인종을 넘어 모든 지구 상에서 비슷하게 나타난다. <In Summer>(2013)는 한국뿐만 아니라 태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뉴질랜드 등 여러 나라에서 보았던 다양한 여름 해변의 풍경을 조합해 그린 그림이다.
몇 걸음 떨어져서 보면 이 그림들은 마치 화면 전체가 동일한 색이나 형태로 무한 반복되는 올오버페인팅(All over painting)처럼 보인다. 원래 올오버페인팅은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의 특징 가운데 이미지의 확장과 균일한 화면구성을 설명하던 개념이었다. 나는 내 그림이 비록 구상적인 표현방식을 취하고는 있으나 올오버페인팅의 표현방식이 내가 바라보는 현대사회의 군중 이미지를 표현하는데 꽤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빈틈없이 꽉 채워진 화면은 왠지 화면 밖으로도 상당 부분 확장되어 연결되어 나갈 것 같고 주인공도 배경도 없이 비슷비슷한 사람들의 모습은 별로 특별할 것도 없고 고만고만해 보이는 우리의 삶을 연상시키기에 좋은 구성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평등한 구성을 통해 우리가 가장 행복했던 그 순간만큼은 만인이 동등한 무게로 존재한다는 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군중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도 벌써 10년이 훌쩍 지나가고 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참 많은 일이 있었고 그사이에 그림도 많이 변했다. 정산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내 장래희망은 언제나 화가였다. 그림 그리는 것을 천직으로 여기며 사는 화가에게 삶의 모든 것들은 그림으로 귀결된다. 성곡미술관에서 ‘2017성곡 내일의 작가’로 선정되어 미술관에서 전시하게 되었다. 지면에서 부족한 그림 이야기는 전시장에서 이어질 것이니 날씨가 다시 시원해지는 가을날 전시장에서 그림을 통해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이상원(1978- ) 홍익대 회화과 및 동대학원 회화과 졸업. 금호미술관, 영은미술관, 우손갤러리, 두산갤러리 등 10여 회 개인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대구미술관 등 200여 회 기획전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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