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129)내가 지금 ‘수취인불명’의 편지를 쓰게 된 이유

김기라

이념의 무게_북쪽에 보내는 서안들_수취인 불명_황해 # 2013_project 04, 2013, HD video 10min 09sec





덥다. 가을은 성큼 다가왔음에도. 갈등, 분노, 대립, 충돌로 달아오른 대한민국은 감정적으로 ‘덥다’. 미디어를 통해 혹은 피부로 직접 만나는 정치,자본,종교,역사,남북,노사,지역 간의 갈등에다 개인 간의 싸움까지 그칠 줄 모른다. 내가 말하는 ‘이념’은 좌우 색깔론을 넘어, 이 같은 갈등 유발요인 모두가 공동을 위한 이념들이다. 이념의 무게에 짓눌린 세상, 그래서 나는 슬프다. 조사에 따르면 한국이 이런 사회갈등으로 치르는 경제적 손실, 즉 ‘이념의 무게’에 대한 사회적 합의 값이 240조 원 이상이라고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7개 회원국 중 두 번째로 높다(1등은 터키다). 갈등에 대한 천문학적 사회비용과 물리적 낭비뿐 아니라 공동선의 부재라는 현실에 나는 분노한다. 그리하여 요즘 나의 작업들은 그 물리적 비용을 가로지를 수 있는 방법과 내가 할 수 있는 실천을 향하고 있다. 제주, 평택, 광화문, 백령도 등지를 돌아다니며 나는 공동선을 위한 이념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가벼이 할 수 있을 방도를 찾고 있다. 이념의 무게로 타들어 가듯 더웠던 어느 날, 내가 책상 앞에 앉아 '수취인불명'의 편지를 쓰게 된 이유다.


수취인 불명

냉면을 먹다가 당신 생각이 나, 편지를 적습니다.

아 참, 식사는 하셨습니까?

요즘처럼 날씨가 후덥지근해 지치는 날이면 어김없이 냉면이 생각납니다.

누구는 더운 몸을 파고드는 얼얼함이 냉면의 매력이라고 하던데, 나는 톡톡한 메밀 면에 담백한 국물 맛을 좋아해 평양냉면을 으뜸으로 꼽는답니다.

평양냉면, 이름만 되뇌어도 입안에 침이 또 고이는군요. 당신은 어떤 냉면을 좋아하는지 궁금하네요.

나는 냉면집의 풍경도 참 흥미롭습니다. 남한에서 ‘평양’이라는 이름이 이렇게 친근하게 불리는 곳이 또 어디 있겠냐는 생각이 들 때면, 혼자 웃기도 합니다. “평양”을 큰 소리로 외치건, 붉은 글씨로 커다랗게 적은 깃발이 펄럭이건 누구도 불편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똑 같은 상황이 시내 한복판 광장이나 군중이 모인 집회 현장에서 펼쳐졌다면 아주 예민해졌을 일인데 말이죠.

냉면이 중국에서 유래한 찬 국수든, 우리네 전통음식이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지금은 어엿한 우리 음식인데. 소박한 이 음식을 조선의 순조 임금이 야식으로 드셨고, 고종 황제도 덕수궁에서 겨울 야참으로 냉면을 즐기셨다더라고요. 냉면 한 그릇이 왕부터 평민까지, 그때부터 지금까지, 북쪽부터 남쪽까지 두루 섭렵한 셈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같은 음식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 아닐까요? 맛에 대한 공감은 같은 기억의 공유니까요. 이건 우리가 한 핏줄이고, 한국말을 사용한다는 것 이상의 큰 의미라고 생각해요.

밥 한 끼 먹는데 무슨 정치적 갈등과 이념적 무게가 있겠어요? 이 순간 나에게 신념이 있다면, 다시 못 올 오늘의 이 한 끼를 ‘맛있게’ 먹어야겠다는 의지가 있을 뿐이죠. 그게 평양냉면이든 개성만두든, 벽제갈비든 섬진강 재첩국이든 상관없다구요.

잘 지내세요. 끼니 거르지 말고요.


2013년 7월

남쪽 당신의 형제이자 친구

김기라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