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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남산 아계 위 천우각

최열

잠깐 세상 티끌바람에 섞여 살고   且與風塵混

오로지 시와 술 다투어 즐기느니   聊將詩酒爭

술 취하면 흥 따라 가고        醉來唯自適

기이한 시로 사람 놀래려네       奇處要人驚


- 남은, <홀로 앉아[獨坐]>, 『읍취헌유고(翠軒遺稿)』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은 일찍이 1415년 남산을 비롯한 도성 일대에 송충이가 창궐하자 한성부에 명하여 송충이를 박멸하도록 하고 남산 관리에 전력을 기울이도록 하였다. 이러한 자연보호 정책은 제도화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공조(工曹)로 하여금 도성 주변 산림에 입산금지표(入山禁止標)를 세우고 벌목과 채석을 금지하게 했으며 또한 병조(兵曹)로 하여금 감역관(監役官)과 산지기를 두어 나무를 재배토록 하는 규정을 두었다. 그리하여 남산은 금송(禁松) 지구로서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났는데 누구도 소나무를 베어가지 못했다.


20세기에 이르러 일본이 남산을 개발하며 소나무 숲을 훼손하기 시작하였지만 해방 직후까지도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는 숲이 울창했다. 그런 까닭에 <애국가> 2절에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소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라는 가사가 실감 넘치는 풍경이었다. 1897년 일본 거류민들이 1ha에 이르는 남산 북쪽 기슭을 임차해 왜성대공원을 개발했고 1906년에는 예장동(藝場洞)에 경성이사청을 설치하고서 일대를 경성공원으로, 그 뒤 1908년에는 남산 서쪽 회현동(會賢洞) 일대 30만평을 공원으로 만들기로 하고 그 땅에 한양공원을 개설하였다. 일본은 남산 전체를 공원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추진해 예장동 일대와 장충동(裝忠洞) 일대를 그렇게 만들었다. 해방 뒤에도 그 정책을 계승해 끝없는 개발을 지속해 동상이며 기념비에 또 굴을 뚫고 극장, 도서관, 식물원, 운동장, 주차장, 호텔에 심지어 임대아파트나 송신탑 따위 온갖 시설과 건물을 세워 그 아름답던 풍광은 어디론가 사라진 채 들쭉날쭉 제멋대로 변해갔다. 1975년부터 성곽 복원공사를 시작한데 이어 1990년 서울시가 남산제모습가꾸기 사업을 시작했지만 제 모습 찾는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남산은 예로부터 목멱산(木覓山)이라 불렀는데 바위를 드러내는 다른 산과 달리 흙산으로 숲이 뒤덮여 부드럽고 또 봉우리가 둥글고 푸른 산이다. 그래선지 서북쪽은 가파른데도 마치 누에머리처럼 부드럽기조차 하다. 유본예(柳本藝, 1778-1842)가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목멱산은 도성(都城)의 남쪽 산인데 “마치 달리는 말이 안장을 벗은 형국”이라고 크게 그리고서 북쪽 기슭을 다음처럼 설명했다. “남산 기슭 주자동(鑄字洞) 막바지에 평평한 잔디밭이 있다. 즉 병영(兵營) 군사들의 무술을 연습하는 곳으로 예장(藝場)이라 한다. 보통 왜장(倭場)이라 하는 것은 예를 왜와 혼동한 것으로 잘못된 것이다.”


북쪽 기슭은 평평하기만 한 게 아니라 굴곡져 주름 깊은 계곡이 즐비한데 갈래가 여럿이다. 그 가운데 아계(溪)는 필동(筆洞)에서 남산으로 향해 오르는 곳이다. 여기에 천우각(泉雨閣)이 있다. 천우각은 금위영(禁衛營)의 분영인 남별영(南別營) 소속 관청의 건물로 흐르는 개울에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지어 여름철 피서하기에 제격이라고 하였다. 그 계곡 바위에 누군가 ‘丫溪’란 두 글자를 새겨 두었는데 아(丫) 자의 생김새처럼 두 물 길이 하나가 되어 흘러 내려 남부 성명방(誠明坊)에 있는 필동교(筆洞橋)를 지나 지금 충무로(忠武路) 4가인 생민동(生民洞)의 시냇물과 합쳐서 낙선방(樂善坊)에 있는 청계천 영풍교(永豊橋)와 합친다.


국토의 풍경을 아로새긴 화가 김윤겸(金允謙, 1711-1775)의 <천우각>은 소나무 숲을 이룬 남산 일대를 참으로 장대하게 묘사하였다. 천우각을 화폭 중심에 대담하게 배치하고 멀리 남산을 그렸는데 이렇게 화가의 시선으로 보니 남산이 참으로 깊고 깊어 보인다. 실로 성현(成俔, 1439-1504)은 『용재총화(傭齋叢話)』에 한양 일대 경치 좋은 곳으로 삼청동을 으뜸으로, 인왕동을 버금으로 꼽고서 쌍계동, 백운동, 청학동 세 곳을 그 다음이라 했으니 청학동이 곧 남산의 계곡인데 골이 깊고 물이 맑아 찾을만한 승경(勝景)이었던 것이다. 조선 개국 직후 “남산에 남은 것 없다”는 동요가 널리 퍼지더니 건국공신이자 16세기 최대시인 남은(南誾, 1354-1398)이 왕자의 난 때 그만 주살 당하고 말았다. 스스로 운명을 예감했었던 것일까. 남산을 보고 있자면 홀로 앉아 슬픈 노래 부르던 남은의 서글픈 노래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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