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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한양굴이었던 평창동부

최열

소매 휘두르며 가보면 분홍빛 감돌고  拂袖俄從紅出

자세히 보면 희미한 푸른 빛 서리네  扶徐踏翠微來

외로운 스님 따라 숲 밖으로 나오니  孤僧引到藤蘿外

한없는 구름 안개 술잔에 비친다    無限雲嵐照把


- 이익, <북한사수(北漢四首)> 중, 『성호전집(星湖全集)』 3권



평창동(平倉洞)은 1998년부터 지금껏 내가 출입하는 마을이다. 오랜동안 가나아트센터를 다니다가 2008년 경복궁 곁 효자동으로 떠났는데 지난 해부터 다시 출입을 시작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어떤 운명의 힘이 작용한 듯, 끌려오고 보니 궁금하다. 평창동은 어떤 땅인가.


서울대 규장각 소장 <해동지도(海東地圖)>에 있는 두 장의 한양 지도 가운데 <경도오부(京都五部)>를 가만히 살펴보면 지도 맨 위쪽 꼭대기 인수봉(仁壽峯) 아래로 하나의 산악(山嶽)이 가파르게 모여 있고 바로 그 아래 구멍 뚫린 것처럼 텅 빈 동부(洞府)가 환하게 펼쳐진다. 이곳에 마을이 있어 처음엔 한양굴(漢陽窟)이라 했으니 말 그대로 하나의 동굴처럼 기다란 분지를 이룬 지역이었고 근처엔 창고만이 널려 있을 뿐이었던 모양이다. 지금으로부터 250년 전 지도인 이곳 한양굴에 ‘경리상창(經理上倉)’이니 ‘경리하창(經理下倉)’ 그리고 ‘선혜창(宣惠倉)’이란 이름이 나와 있는 것처럼 말이다.


1608년 상평창(常平倉)을 계승한 선혜청은 이곳 한양굴에 새 창고인 선혜창을 설치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기존의 창고인 평창(平倉)과 구분해서 센창[新倉]이라 불렀었다. 또 경리창은 경리청(經理廳)의 창고를 뜻하는데 경리청은 숙종 때인 1711년에 축성한 북한산성을 관리하려 설치한 관청이었다. 경리청은 이곳 상창과 하창에 고지기 1명, 군사 2명을 파견하여 관리하였으며 또 영조 때인 1747년 총융청(摠戎廳)이 경리청 업무를 옮겨 받아 북한산성 수비를 담당하고 평창을 설치하였다. 이처럼 한양굴의 여러 창고에는 센창이니 상창, 하창과 같은 이름이 번갈아 붙여졌지만 사람들은 이 마을을 한양굴 또는 평창굴(平倉窟)이라 불렀으므로 여전히 처음 상평창의 평창이란 이름은 사라질 수 없었다. 지금의 평창동(平倉洞)이란 이름은 그렇게 질긴 생명을 유지한 결과였던 것이다.


지금 평창동이라 부르는 이곳은 조선시대 때 의통방(義通坊)에 속해있었다가 영조 때 상평방(常平坊)에 속했는데 1914년에 처음으로 평창리(平倉里)로 바뀌어 1950년 3월 15일 드디어 평창동이란 이름을 획득했고 1975년 종로구에 편입될 때까지는 서대문구에 속했었다.


군량미(軍糧米)건, 진휼미(賑恤米)건 이곳은 식량을 저장하는 나라의 창고였다. 전쟁과 재난에 대비하여 곡식을 저장하는 이곳 한양굴을 지키는 관리는 두 명의 군인이었지만 실은 이곳의 병풍을 이루는 동쪽의 보현봉(普賢峯)과 서쪽의 문수봉(文殊峯) 두 봉우리였다. 흰 코끼리를 타고 앉아 중생의 목숨을 연명케 하는 실천으로 덕행을 주재하는 보현보살, 오른 손에 지혜의 칼을, 왼손에 슬기를 상징하는 청련화(靑蓮花)를 쥐고 사자 위에 앉아 위엄과 용맹으로 지혜를 주재하는 문수사리가 승가봉(僧伽峯), 비봉(碑峯), 향림봉(香林峯)을 서쪽 줄기에 거느리고서 굳건히 지켜 주는 땅이니 민인의 생명을 담보하는 마지막 비상구이자 피난처였던 것이다.


그래서 평창동엔 보현산신각(普賢山神閣)을 세워 산신도를 봉안하고 그 위로 천제단(天祭壇)을, 아래엔 부군당신목(府君堂神木)을 길렀으며 또 지금 북악터널 근처에 여단(壇)을 설치했다. 천제단은 정월 보름날 풍년을 기원하는 기우제(祈雨祭)를 위해, 여단은 질병과 억울함을 해원하는 별여제(別祭)를 위해 국가가 설치한 제단이었다. 하지만 외세의 침략과 더불어 조선왕조가 끝날 때 함께 중지한 뒤 세월 흘러 천제단은 바위 흔적만 앙상하고, 여단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여단 터조차 없어진 건 1974년 8월인데 그 터에 세운 북악파크호텔도 2009년에 사라져 지금은 황량한 빈터로 남아있다. 지나갈 적마다 백오십만 소를 산 채로 매장해야 하는 저 구제역이며 끝없는 조류인플루엔자가 강산에 확산됨에 아무리 문수, 보현이라 해도 아름다운 강을 파헤치고 또 아름다운 산을 뚫는 저 인간의 욕망에 대한 경고가 아닐까 두려움에 휩싸이곤 한다.


산천에 함부로 손대지 않았던 250여 년 전, 조선학술의 스승 이익(李瀷, 1681-1763)이 세검정(洗劍亭)에서 ‘젊은이들 서둘러 등산길 떠나며 사이좋게 손잡은 모습 보기 좋다’ 여기고서 북한산 올랐다 내려 올 때 부른 저 노래 가슴 저리도록 좋았던 이곳 풍경이 꿈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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