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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인왕산 기슭에서 맞이하는 봄꽃의 물결

최열

서대(西臺)에 백가지 꽃 붉으니 이를 함께 즐기리               西臺白花紅 正是同玩賞
어린이는 새 옷 입고 늙은이는 대지팡이 짚었네                  少者成新服 老者扶竹杖
붉고 푸른 만 가지 모양 누대 위에서 바라보기 시원하네     紫綠呈萬狀 樓臺相望敞
봄놀이 하기 좋은 곳 향기로운 풀 한가로이 따라가네          春遊觸處成 芳草隨閒往

- 이인위(李仁煒, 1768-?), <등고상화(登高賞華)>,『 옥계사 수계첩(玉溪社修禊帖)』, 1786


임득명, 등고상화(登高賞華), 종이, 24.2×18.9㎝, 개인소장



1786년 7월 16일 옥계시사 창설 당시 읊었던 시와 그린 그림을 묶은 삼성출판 박물관 소장 『옥계사 수계첩(玉溪社修禊帖)』에는 열 두 가지 빼어난 것을 뜻하는 ‘옥계사 십이승(十二勝)’을 시와 그림으로 읊고 그려 수록해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림은 네 폭만 남아있다. 남은 네 폭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건 바로이 <등고상화(登高賞華)>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임득명(林得明, 1767-1822)이다. 임득명은 1813년<서행일천리도권(西行一千里圖卷)>이라는 명작을 남긴 화가다. 이 그림은 한양에서 평안도 의주(義州) 용천(龍川)에 이르는 북서지역 여행을 하면서 그린 풍경으로 서글서글한 게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게다가 또 임득명은 옥계시사활동상을 보여주는 시집 『송월만록(松月漫錄)』을 남긴 시인이었다.

이 작품 <등고상화>는 꽃피는 봄날 인왕산 기슭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그림 가운데 가장 빼어난 걸작이다. 지그재그식 구도를 기본으로 하늘은 텅 비워두고 땅은 꽉 채워 선을 따라 분홍색 꽃잎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버드나무에 연둣빛 싱그러움이 먹물과 어울려 퍼져나가는 게 눈부시게 황홀하다. 산등성이에 7명이 아주 선명하고 하단에 꽃과 나무와 집으로 이루어진 마을 풍경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임득명 보다 한 세기 전 사람인 정선(鄭敾, 1676-1759)도 이곳 필운대(弼雲臺) 풍경을 그렸는데 사뭇 다르다. 정선은 멀리 관악산도 그릴 만큼 시야를 넓게 잡고서 각각의 지형지물을 세심하게 그렸던 것이다. 하지만 임득명은 그와 같은 지형지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앞서 말한 바처럼 화폭의 중심축을 S 선으로 설정하고 그 선에 따라 사람과 꽃과 나무와 집을 구불구불 물 흐르듯 배치했다. 나머지는 넓은 여백으로 두어 전체 화폭은 얼핏 분홍, 연두, 먹색의 추상화처럼 보인다. 실제로 인왕산 기슭을 그렸다는 기록이 없었다면 이게 어느 곳을 그린 것인 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요즘 인왕산 아랫마을은 몸살을 앓고있다. 봄날만이 아니라 사시사철 젊은 행락객들로 붐빈다. 문화의 거리라는 게 인사동에서 북촌 자락으로 올라오더니 삼청동을 점령하고 난 뒤 경복궁을 훌쩍 건너뛰어 서촌이 뜬지 벌써 몇 해가 흘렀다. 땅값,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른 지 오래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문화의 거리라는 건 무엇일까. 뜻을 새겨 보면 당연히 연극이나 무용을 수용하는 무대며 미술관이나 서점 또는 서화 골동을 거래하는 시장이 즐비하게 줄을 섰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다방이나 음식점 그리고 장식구며 옷가게뿐이다. 그것도 의식주 문화를 구성하는 핵심이니 문화라면 문화니까 할 말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예술을 뺀 문화만 판을 치고 있다. 예술을 지워버린 문화는 아마도 노른자 위가 없는 달걀이거나 속을 비운 수박일 텐데 그것도 달걀이고 그것도 수박이라면 그건 가짜문화일 게다.

3월 10일 국정농단의 주범인 대통령이 파면당했다. 문화부의 인사 전횡, 블랙리스트 사건처럼 국정농단의 무대가 문화부였던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올바른 문화정책을 펼쳤다면 저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지만 지금도 반성과 성찰이 없고 변명뿐이다. 이래저래 저 해괴망측한 현실을 생각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동네에 가짜문화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다.

문득 이 작품에 줄지어 무리를 이룬 분홍색 꽃잎들이 가짜문화를 탄핵하는 촛불처럼 보인다. 하지만 임득명이 이 그림을 그릴 적엔 참된 문화, 시와 음악과 회화가 저 자연과 조화를 이루던 시절이었다. 그때 그 풍경을 노래한 옥계시사 동인 창석(蒼石) 이인위(李仁煒, 1768-?)의 노랫가락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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