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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서대문 영은문터와 독립문 앞에서 독립을 생각한다

최열

돈의문(*서대문) 밖에는 무엇이 보이는가       敦義門外何所見
봄날 교외에서 말타고 창 휘두르는 놀이 하네   舞槍春郊猿騎駚
반송지 물 푸르러 염색할만 하고                      盤松池水綠可染
푸른 연꽃 물결에 흔들려 흰 풀도 잠겨있구나   演漾靑荷涵白芷

- 이덕무,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 1792, 박현욱 옮김, 
『성시전도시로 읽는 18세기 서울』(보고사, 2015) 



관반계첩도(館伴契帖圖), 1600, 종이, 48.6×31.2㎝, 개인소장


요즘에야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거의 오지 않지만 내가 자라던 시절엔 문득 오곤 했다. 한 번 올 때면 대한민국이 무슨 축제의 광장이나 되는 듯 한바탕 뒤집어졌다. 그만큼 우리에겐 미국이 중요한 나라였던 것인데 지금 내 기억에는 피로 맺은 동맹이라는 뜻의 ‘혈맹(血盟)’이라는 낱말로 남아있다.

조선시대에도 그 같은 구세주가 또 하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구원한 명나라의 신종 만력제가 바로 그다. 물론 고려시대 이래 중국과 천자와 제후 관계를 맺어 사대 조공외교를 통해 생존을 도모해 온 사실이야 두말할 나위 없지만, 임진왜란 때 원병은 6·25전쟁 때 원병과 같은 것이었고 그로부터 중국과 미국은 우리에게 생존의 보호막이었던 것이다. 지금 주한미군 주둔, 전시작전권 이양, 사드(THAAD) 배치를 피해갈 수 없음은 모두 그 역사로부터 비롯한 숙명과도 같은 것이란 뜻이다. 조선시대의 경우에도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군으로 파견된 명나라 군대 총사령관 이여송이 조선의 전시작전권을 통째로 장악했었다. 또한, 1593년 저 이여송의 생사당(生祠堂) 건립이며 1601년 동대문 밖 숭인동에 설치한 관우(關羽)를 기리는 동묘(東廟) 건립은 1957년 인천 자유공원에 세운 맥아더 장군 동상을 비롯해 1959년 이태원의 콜터장군동상(1977년 어린이대공원 후문으로 이전), 1960년 육군사관학교의 밴플리트장군동상 건립과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겠다.

1600년 그러니까 임진왜란이 끝나고 두 해가 지난 그 어느 날 모임이 열렸다. 전쟁 중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그들을 접대했던 관반사(館伴使)를 포함한 20여 명의 모임이었다. <관반계첩도(館伴契帖圖)>를 보면 이들의 모임 장소는 영은문(迎恩門)과 모화관(慕華館)이 보이는 곳으로 지금의 독립문이 자리한 서대문 독립공원 부근이다. 복판에 행사장소인 천막 시설이 소나무에 둘러싸여 있고 앞마당에 영은문이 서 있다. 화폭 하단은 모화관의 경계인 담장이 아주 뚜렷하게 에돌고 있고 화폭 상단은 서쪽에서 바라본 인왕산 모습으로 그 능선을 따라 성곽이 길게 늘어선 인왕산 줄기가 옆으로 뻗어있다.

여기 참석한 인원 가운데 심희수(沈喜壽, 1548-1622)와 윤형(尹泂, 1549-1614), 한응인(韓應寅,1554-1614)은 중국어에 능통하여 임진왜란 내내 접반관 뿐 아니라 외교에서 업적을 세운 이들이고 강신(姜紳, 1543-1615)도 명나라 군사와 합동작전을 펼쳐 왜군을 무찌르는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특히 한응인(韓應寅, 1554-1614)은 출사한지 8년만인 1584년부터 명나라를 상대로 하는 외교 활약을 전개했는데 1592년 임진왜란 발발과 더불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원군을 청해 성사시켰고 그해 12월 저 이여송이 명나라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자 접반관(接伴官)으로 나아가 맞이했으며 이후로도 외교관으로 꾸준히 활약한 공로를 세웠다. 특히 이 <관반계첩도>를 완성하던 1600년에 이조판서가 되기도 했다.

그들이 이런 모임을 갖던 장소는 지금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변해있는데 <관반계첩도>에 보이는 영은문은 지금 둥근 기둥 두개만 남아 있다. 영은문이 저렇게 철거당한 때는 1895년 2월 이른바 친일내각이라고 하는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이다. 독립협회가 영은문을 사대외교의 상징물로 지목하고서 고종으로부터 허락을 얻어 1896년 11월 독립문 건설 공사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고종은 중국과 사대 조공외교를 청산했다. 요즘 THAAD라는 유령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시아 하늘을 배회하고있다. 살아남기 위해 그 같은 대결을 불사한다지만 그게 또 다른 어려움을 불러오고 있으니 황망하기 그지없다. 영은문을 헐고 모화관을 독립관이라 바꿨건만 그 중국으로부터 독립이 오히려 일본의 조선진출 길을 열어주었던 꼴과 무엇이 다른가. 나는 희망한다. 1792년 이덕무(李德懋, 1741-93)가 서대문 밖 풍경을 저토록 해맑게 노래했던 때로 우리가 되돌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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