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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서대문 냉천동에서 성호 이익의 시를 읊고 어린아이를 생각하다

최열

쉰 살 나이에 섣달 그믐이 다가오는데         五十行年逼歲除
흐린 눈 흰 머리로 내 집이나 지키는구나      眼昏頭白守吾廬
거친 음식 배불리 먹음에 다른 생각조차 없어 藜羹鮑吃無餘念
밤에 시골 아이 모아 글 읽는 모습 볼 뿐이네  夜聚邨童看讀書


- 이익(李瀷, 1681-1763), <쉰 살[五十行年]>『 성호전집(星湖全集)』



정수영, 백사회야유도(白社會野遊圖), 1784, 종이, 41×31cm, 개인소장


쌀쌀하지만 햇볕이 맑아 그야말로 청명한 시절을 누리는 건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도시에서 맞이하는 절정의 가을은 기껏 며칠처럼 짧다. 이번 가을도 예외는 아닐게다. 그런 어느 날 한 모임이 있었다. 예술사 연구자들 몇인데 문학, 연극, 영화 분야의 세사람과 미술사를 하는 나까지 네 사람이다. 

쉰 살을 넘긴 연구자들은 세월이 만들어준 중년의 분위기를 느끼며 절제의 미학으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여기 모인 네 사람은 친일청산론으로 역사를 담론하고 있었으니 바야흐로 민족 가치를 추궁하는 지식인들의 모임이었던 것이다. 가을 맑은 날처럼 사람사는 세상이 깨끗하길 바라듯 지식인들 발자취도 그래야 한다고 믿는 이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옛 그림을 만난 것은 바로 그날 밤이었다.

1784년 음력 12월이니까 늦가을 어느 날 백사(白社) 동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사대부 지식인들이 이런 조직을 만들어 가끔 모임을 해온 것은 제법 전통이 긴 일이었다. 백사 동인은 벼슬에서 은퇴한 남인 계열 원로들의 조직으로 시와 그림을 즐기는 일을 했던 듯 하다. 정수영(鄭遂榮, 1743-1831)이 그린 <백사회야유도>는 지금 서대문 밖 냉정(冷井)고을 바위계곡 연암(烟巖)에 모인 백사 동인들의 시회 장면이다. 찬 우물이란 뜻의 냉정은 서대문 밖 넝쿨 내를 건너 금화산(金華山) 기슭 냉천동(冷泉洞)의 우물을 말한다. 그 찬 우물이며 곁에 있던 바위 연암은 지금 경기대 뒤 북쪽 산기슭에 거대한 아파트촌이 들어섬에 따라 흔적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몰락당한 지 오래인 남인 계열 세력은 위축될 만큼 위축된 상태였다. 그러다가 정조가 등극하자 어느덧 세력을 회복하여 영의정 자리까지 차지하는 힘을 보였다. 그림 속 백사 모임은 세력을 회복한 지 8년 뒤의 일이므로 남인 원로들이 몇몇 후배들을 불러 격려하는 자리인지도 모르겠다. 소북 당파에 속했던 선비화가 정수영까지 합류한 모임의 내력을 알 수는 없지만 그림은 권력을 회복한 남인 원로들의 여유로움을 한껏 부풀려 보여주고 있다.

세 그루 소나무의 튼실함과 연암 바위의 견고함이 돋보이는 가운데 둘러앉은 동인들의 자세 또한 당당하다. 바위 사이로 한껏 자라난 국화꽃이며 힘차게 내리흐르는 물줄기가 이들의 충만함을 노래하는 듯 한데, 특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완만하게 치솟는 사선 구도야말로 세력의 밝은 미래를 가름하는 듯하다.

화가 정수영은 18세기 말 19세기 초 새로운 감각의 화필을 구사하여 회화사를 혁신해 나간 화가요, 강세황의 뒤를 잇는 정상의 화가다. 어린 시절 몰락한 가문에서 벼슬길을 따르지 않고 평생 전국을 유람하며 지리학에 빠진 할아버지 정상기의 영향을 받은 듯 손자 정수영 또한 관직에 나가지 않고 세상을 떠돌며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나갔다.

남인 원로들은 백사 동인 모임 날에 마흔한 살의 정수영을 불렀을 것이고 그 보답도 넉넉히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보답 때문에 정수영이 그림을 그리진 않았을 터이다. 정수영은 사대부이자 지식인이며 또한 시에서도 이미 이름을 날리던 선비였다. 그럼에도 장인들이 전담하던 기록화 제작을 거절하기는커녕 이토록 아름답게 묘사했던 까닭은 남인 당파의 이상에 뜻을 함께하는 자신의 이념과 사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겠다. 

나는 이렇게 사람들이 모인 그림을 보면 늘 부럽다. 얼마 전 모인 우리의 모임에도 화가가 있었다면, 게다가 뜻까지 함께하는 화가가 있었다면 모임의 정신까지 담은 정수영의 그림과도 같은 기록화를 그려 남겼을 터인데 말이다. 문득 『성호전집(星湖全集)』을 펼쳤더니 <쉰 살[五十行年]>이란 시가 눈에 들어왔다. 남인당 명문가의 후손으로 평생 출사하지 않은 채 안산(安山)에서 평생을 살다간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생애를 생각한다. 그의 50살은 어떤 것이었을까. 

후예들이 세력을 회복하여 냉천동에서 모임을 할 줄 아셨던것일까. 아니 그보다는 250년 뒤 가라앉는 세월호에 갇혀 숨져간 고향 안산의 어린 학생이 흘리는 눈물을 짐작이나 하셨을까. 궁금하다. 하늘나라에서 안녕하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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