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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아차산 아래 살곶이벌에서 말과 왕의 귀환을 기다리며

최열

봄철 교외 가느다란 풀은 비단자리 같은데        春郊細草如華茵 
봄바람에 술을 싣고 노는 사람 찾아가네          春風載酒尋遊人 
아침엔 준마 타고 푸른 풀 밟고 나갔다가         朝乘駿馬踏靑去 
저물녘 취해 돌아오며 공연히 봄을 아까워하네   日暮醉歸空惜春 

- 월산대군(月山大君), <살곶이벌을 찾다[箭郊尋訪]>



작자미상, 진헌마 정색도(進獻馬 正色圖), 1678, 종이, 30×42.2cm,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마장(馬場)-진헌마 정색도(進獻馬 正色圖)>는 전국 규모의 『목장지도(牧場地圖)』 첫 장에 실려 있는 그림이다. 지금 성수대교 남단에서 한강 건너 북동쪽을 바라보는 풍경으로 그림의 상단에는 멀리 아차산(峨嵯山)이 어깨를 쫙 편 채 우아함을 자랑하고 있다. 하단 한강변에 뚝섬[纛島]을 그려 두고 지명을 표기해 두었다. 그리고 오른쪽 중단에 화양정(華陽亭)을 높은 곳에 크게 그려두었고 왼쪽 하단에는 응봉(鷹峯)을 거대한 바위로 그린 뒤, 바로 그 아래 중랑천(中浪川)을 가로지르는 살곶이[箭串] 다리를 아름답게 그렸다.

하지만 이 그림의 주인공은 드넓은 살곶이 벌판을 자유롭게 노니는 21마리의 말이다. 흰색, 검은색, 회색, 노란색으로 각양각색의 말들이 어울려 노니는데 새끼를 품은 말, 서로 목을 비벼대는 말, 내달리는 말, 내뒹구는 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말, 냇물가에 나란히 서서 물장난치는 말의 모습이 무척이나 활기에 넘친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형식에서도 뛰어난 구도를 갖추고 있는 데 옆으로 긴 타원 구도로 설정하고서 그 타원을 빙 둘러 조그만 사각형 표식을 마치 성곽처럼 촘촘하게 그려두어 생기가 돌게 장식했다. 화폭 위쪽에는 아차산, 왼쪽에는 중랑천과 응봉, 오른쪽에는 화양정, 아래쪽에는 옆으로 길게 늘어선 방풍림, 복판에는 벌판에서 뛰노는 말들을 배치하여 변화와 안정의 완벽한 조화를 꾀했다.

무능한 왕 인조(仁祖)는 청나라에 항복과 더불어 두 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인질로 보낸 데다 소현을 죽음으로 내몰고서 봉림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 봉림이 효종으로 등극하였는데 효종은 멸망한 명나라를 숭배하고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청나라를 배격하는 사상을 갖고서 이른바 북벌(北伐)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숭무정책(崇武政策)을 추진한 효종은 당연히 군비확장을 꾀했는데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1692)을 1654년 훈련도감(訓練都監)에 배속시켜 새로운 조총(鳥銃)을 제작토록 하였다. 또한, 1652년 8월 모화관(慕華館)에서 무관을 뽑는 시험인 관무재(觀武才)를 친히 실시하였으며, 1655년 9월 29일 노량진(露梁津)에서 1만 3천 군사의 위용을 시험하는 열무식(閱武式)에 참석하였다. 열무식은 세자와 문무백관, 도성 시민과 사대부가문의 여성까지 참여하여 장관을 이루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허목(許穆, 1595-1682)이 김석주(金錫胄, 1634-84)와 상의하여 제작한 것이 바로 이 『목장지도』였다. 이 지도에 나타나는 목장은 아차산 아래 면목동, 중곡동, 송정동, 화양동, 성수동 일대로 이곳이 살곶이벌[箭串坪]로 굉장히 넓다. 중랑천 건너쪽으로는 경계지대를 벗어나 있지만 사근동, 마장동과 용답동, 장안동, 답십리동 또한 인근 마장으로 장안벌[長安坪]이라는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동 이름에서도 면목(面牧)이며 마장(馬場)이라고 불렀던 건 말을 기르는 목장이라는 뜻에서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가장 이름 있는 건 마조단(馬祖壇) 터와 살곶이 다리 그리고 화양정이다. 태조 이성계가 살곶이벌에 마장을 개설하고 행당동 살곶이 다리 서쪽 언덕 위에 마조단을 설치해 말의 조상에게 제사 지내게 했다. 그 뒤 세종이 이곳에 와 보는 데 교통이 불편하여 지금 행당동에서 성수동 뚝섬으로 건너는 곳에 다리를 개설하도록 하였다. 길이 95m나 되는 돌다리로 당시 최대 규모였다. 언젠가 폭을 넓히려 중간에 시멘트로 27m 가량을 늘여 옛 기운이 줄었지만, 장대함은 여전하다. 

또 세종은 말이 뛰노는 장관을 한눈에 볼 수 있을 높은 지대에 정자를 짓도록 했는데 그 정자 이름이 화양정이고 오늘의 화양동은 그 이름을 딴 것이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갈 적 하룻밤을 묵었는데 다시 돌아올 것을 꿈꾸던 이들이 정자 이름을 회행정(回行亭)이라 고쳐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회행정은 그렇게 홀로 버티다가 1910년 7월 낙뢰가 떨어져 무너졌는데 그로부터 한 달 뒤 나라마저 무너지고 말았다. 왕위를 빼앗긴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88)이 이곳 마장에 들러 불렀던 노랫가락이 공허한데 문득 흔적조차 사라진 땅 뚝섬에 갈 때면 나는 말과 나라와 왕의 귀환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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