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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변절의 시대, 안평대군의 비해당터에서 몽유도원을 꿈꾸다

최열

세상 어느 곳 도원이라 꿈꾸었나      世間何處夢桃源
들과 산에 숨은 이들 눈에 선한데      野眼山冠尙宛然
그림으로 그려두니 참으로 좋구나      著畵看來定好事
그렇게 천년을 전할만하지 않겠는가     自多千載擬相傳

- 안평대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제시(題詩)>, 1450년 1월 1일

권신응, <북악십경 옥류동>, 1753, 종이, 41.7 × 25.7 cm, 개인소장.

권신응(權信應, 1728-86)이 그린 <북악십경-옥류동>에는 인왕산(仁王山)과 수성동(水聲洞) 그리고 청휘각(淸暉閣) 세 곳의 지명을 써넣은 것이 보인다. 그림의 오른쪽 계곡 물줄기 위에 청휘각이 보이는데 이는 옛 지도에 나오는 백운동과 옥류동 사이에 있던 누각으로 지금의 옥인동 47번지 자리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옥류동(玉流洞) 항목에 저 청휘각이 나오는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인왕산 아래에 있는데 수석(水石)이 좋은 경치가 있다. 계래란(鸂鶆瀾), 청휘각(淸暉閣)이 있는데 모두 사암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이 이름 지은 것이다. 물이 석벽 사이에서 나오며 벽상에는 옥류동이란 세 글자를 새겼다.”

이곳 백운동과 옥류동 사이를 ‘청풍계(淸風溪)’라 불렀고 이곳은 안동김문의 위세를 드높였던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집터였다. 그러므로 김상헌의 후손인 김창협이 청휘각이란 이름을 지었던 것은 자랑스러운 가문의 빛을 기리는 것이었다. 그림의 왼쪽으로 보이는 수성동은 옛 옥류동과 누각동(樓閣洞) 사이의 계곡인데 지금의 누하동(樓下洞)과 옥인동(玉仁洞) 일대를 가리킨다.『 한경지략』을 보면 수성동에 대해 다음처럼 썼다.

“인왕산 기슭에 있다. 골짜기 깊고 그윽해서 물 맑고 바위 좋은 경치가 있어서 더울 때 소풍하기에 제일 좋다. 혹은 이 동리는 옛날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53)이 살던 터라 한다. 개울 건너는 다리가 있는데 이름을 기린교(麒麟橋)라 한다.”

옛 모습 그대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근래 기린교 일대를 복구해서 수성동 계곡을 산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기린교는 1971년에 지은 옥인시범아파트를 2009년에 철거할 때 되찾았는데 시멘트로 덮고 철제난간을 설치했던 것을 거둬내고 보니 옛 모습 그대로였다. 지금 복구한 수성동 계곡 전체가 아파트 단지였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인간의 포식이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저 기린교는 서울시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어 보존 가능해졌지만 그린벨트를 마음껏 풀어대고 있는 인간의 욕망이 언제 기승을 부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곳 수성동은 안평대군의 땅이었다. 안평대군은 물소리 맑은 이곳에 그림보다 아름다운 집을 짓고 그 이름을 ‘비해당(匪懈堂)’이라 했다. 지금 이곳 수성동 기린교에 갈 때면 나는 언제나 비해당을 생각한다. 왕권의 야망을 키워가던 형 수양대군(首陽大君, 1417-68)에 맞서 어린 조카 단종(端宗, 1441-57)을 수호하던 안평은 실패했다. 1453년 수양이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말미암아 안평은 비해당을 떠나 강화도로 쫓겨났다가 끝내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등져야 했다. 권력욕의 추악함은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신군부정권에서 국보위로 군림하던 자를 불러들여 국회의원 자리 몇 석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욕망의 화신들이 판치는 세상. 노동운동하던 자가 독재정권에 들어가 국회의원 자리를 꿰차는 변절의 욕망과 무엇이 다른가. 이 해괴한 풍경은 대체 무슨 상황일까. 동지를 내치고 원수를 벗삼는 이 배반의 계절에 나는 몽유도원으로 걸어 들어가야 할까 보다. 문예를 사랑하던 안평이 정상배들의 탐욕에 진저리치던 어느 날, 비해당 북쪽 창의문 고개 넘어 무계정사(武溪精舍)로 들어가 그림 그리고 시를 읊는 풍류를 한바탕 벌이곤 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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