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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김종학 화백의 가정 수복(修復)

김형국

화가들은 물감으로 세상을 그려 사람들과 소통한다. 당연히 말이나 글이 그들의 매체일 리 없다. 그럼에도 ‘설악산 화가’가 아들딸에게 적었던 옛 편지를 공개했으니 ‘김종학의 多情(다정)’ (5.1-5.27, 갤러리현대), 화단의 이색 행사가 분명했다. 편지내용을 간추린 책도 나왔다.



유명 인사 편지는 수집대상이다. 추사 편지 등은 사람들이 많이 탐낸다. 김종학 편지도 종이 귀퉁이에 곁들인 수채화가 애호가의 눈길을 끌었다. 이 이상으로 행간에서 현란한 색채로 설악의 들꽃을 그리게 된 화가의 조형심리 역사를 읽을 좋은 기회였다. 편지는 무엇보다 상대에게 다가가려는 메시지다. 그러자면 우선 내가 있어야 한다. 파경으로 불가피하게 설악산으로 물러났을 즈음의 화가는 죽음도 한 선택이라 여길 정도로 자신감 상실이었다. 그런 그를 설악의 자연이 푸근히 감싸주었다. 모더니즘 미술을 구현하겠다던 각오도 결국 이념의 포로에 지나지 않았다는 깨달음에 이르러, 대신 아름다운 산천을 그리지 않고선 못 베기겠다는 다짐으로 나아갔다. 딸이 미국으로 조기 유학길에 오른 1980년대 중반부터 편지를 적었다니, 바로 그 즈음이 비구상화 대신 설악의 들꽃과 산을 그린 구상화로 화가가 세상에 알려지던 시점과 일치했다. 사람 행동은 밀고 당김, 곧 궁지에서 빠져나옴과 동시에 보람을 갈구함의 역학이다. 화가의 편지에는 그림에 더욱 매진하겠다는 다짐 사이로 어린 자녀들을 직접 거두지 못했던 원죄에 대한 회한이 절절했다.  

 


김종학은 과묵하다. 개인적 이야기는 여간 입에 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일화는 한번 이상 말했으니 그 가슴앓이가 고질로 남았다는 말이었다. 1979년 가을, 실어주는 대로 신변품 등을 싣고 설악산을 향해 이제 막 서울집을 떠날 참이었다. 챙겨준 세면용품에 모자람이 있었든지, 차창으로 뒤돌아보니, 어린 딸이 움직이는 차를 쫓아 달려 나오며 화물칸에다 화장지 뭉치를 울며 던지더라했다. 이 과거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일제에 항거했고, 독립된 나라에서는 독재에 저항했던 강골(强骨)의 소설가 김정한(金廷漢, 1908-1996)이 언젠가 또 끌려간 감옥에서 자녀들에게 보낸 비감의 시가 생각나곤 했다.


비에 젖은 압송차

창 밖에 붙어 서서


다시는 날 못 볼 듯

그렇게 흐느끼던 애들


이 밤은 너희들에게

얼마나 추울고?


악법(惡法)의 감옥에 갇혔던 소설가의 슬픔은, 마치 절에서 꼼짝 않고 지내야 하는 일본 막부시대의 ‘근신(謹愼)’ 처분을 받은 듯, 더 이상 자식들과 정을 쌓지 못해 절망하던 바로 그때의 화가 심정이 아니었겠는가. 활동 연대가 같았다면 화가는 소설가와 무척 마음이 통했을 것이다. ‘낙동강 파수꾼’이라 불릴 정도로 소설가는 환경보전에도 관심이 깊었다. 새도 풀도 많이 등장하기 마련인 글짓기를 위해 길가다 모르는 자연을 만나면 그걸 그려두었다가 기어코 이름을 알아냈다. 달리, “후배들 소설에서 이름 모를 새, 이름 모를 풀이란 말귀가 자주 나오는데, 도대체 이름 없는 새 또는 풀이 어디 있는가. 지들이 모를 뿐이지!” 그렇게 질타했던 대목에서 누구보다 ‘설악산 인’이 소설가에게 크게 박수쳤을 것이다.


편지 전시와 서간집 출간은 화가 주변이 두루 화해 모드에 이르렀음을 말해주는 증표이기도 했다. “남자가 처자(妻子)와 집에 매인 것이 감옥보다 심하구나. 감옥에는 풀려날 기미가 있지만 처자는 잠시도 마음을 멀리 할 수 없구나.” 했음이 불경의 한 구절이라던데, 김종학의 경우 설악 대자연을 외곬으로 그리는 사이, 새 가정은 고맙게도 그림제작만을 떠받치는 안온(安穩)한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다. 생전에 불우하기 그지없었던 유명 동서(東西) 화가 몇몇의 전철을 기억한다면, 인생반전(反轉)의 드라마치고 이만하기가 쉽지 않다.



김형국(1942- )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교대학원 도시계획학 박사. 현 서울대환경대학원 교수, 한국미래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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