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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우리는 모두 호퍼가 되고있다

정윤수

우리는 모두 호퍼가 되고있다

_현대도시의 쓸쓸한 인상



저녁이다. 숲은 서서히 어둠을 받아들이고 있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디테일이 선명한 저택은, 비록 부분만 보이고 있지만, 바로 그 부분에 의하여 제법 근사한 위용에 우아한 치장을 하고 있는 듯 보인다. 저녁 놀이 내려앉기 시작한 마당의 풀들은 바닷바람에 의하여 슬며시 한쪽으로 기울여져 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개는 바라보고 있지만, 현관 앞의 두 사람은 고개를 떨구고 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일까. 아니, 두 사람은 몇 분이고 말이 없는 듯 보인다. 말로 할 수는 없는 어떤 치명적인 일이 생긴 것일까, 아니면 그저 바닷바람과 파도소리와 황혼처럼, 매일같이 찾아오는 일상의 어떤 공회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을 뿐인가, 알 수 없다.



그림은, 에드워드 호퍼의 것으로 1939년 작품이다. 우리 표현으로 ‘코드 곶’으로 옮길 수도 있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지명이 되는 ‘케이프 코드’는 미국 동부 매사추세츠의 대서양 연안에 위치해 있다. 지명 사전은 이곳이 “빙하의 퇴석이 파식작용으로 변형된 곳으로 사주·간석지·작은 호수 등이 많으며 앞바다에 래브라도 한류가 흘러 대구(코드)가 많이 잡히기 때문에 코드 곶으로 불린다”고 적고 있다.


케이프 코드의 프로빈스타운은 유진 오닐이나 노먼 메일러 같은 예술가들이 유달리 사랑했던 곳이며 무엇보다 에드워드 호퍼가 곶의 끄트머리에 거처를 마련하여 오랫동안 그림을 그렸던 곳이다. 우연의 소산이겠지만, 호퍼의 수많은 걸작이 탄생한 케이프 코드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필그림 기념비가 있다. 그러니까 이 일대는 1620년 미국 동부 뉴잉글랜드의 플리머스 식민지에 최초로 세워진 유럽인의 정착지가 되는 곳이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 플리머스를 출발했던 필그림들은 1620년 11월 케이프코드 연안에 입항하였는데, 그것을 기념하는 높이 25m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신앙과 경제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넌 필그림을 시작으로 세계 역사를 뒤바꾼 ‘아메리칸 드림’이 시작되었으며 그 상징적인 장소가 바로 케이프 코드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에드워드 호퍼는 신대륙의 공허함, 신천지의 쓸쓸함, 아메리칸드림의 극단적인 외로움을 그렸다.


나는, 케이프 코드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뉴욕에는 가본 일이 있다. 벌써 십수 년 전의 기억인데, 바쁜 일정의 틈을 간신히 내서 휘트니미술관을 관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그때, 그곳에서 영화 공부를 하던 영화평론가이자 제작자인 임재철 선배가 내게 말했었다. “휘트니에 가면 에드워드 호퍼가 있지. 그 사람은, 뭐랄까, 진짜라고 할 수 있어.” 그의 예민한 심미안을 시샘했던 나로서는 당장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휘트니에서 나는 에드워드 호퍼를 보았고, 그의 그림 속에 담긴 현대의 고독을 보았다. 그러나, 그때는 다만 그런 정도였다. 그림들 속의 인물들, 그들의 말할 수 없는 고독의 시간들을 그저 짐작하는 정도였다. 그랬는데, 점점 호퍼의 그림은 나의 어떤 일상과 겹쳐지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처럼, 나는 ‘올빼미’가 되어 밤낮이 뒤바뀐 채 지금껏 글을 쓰며 살아왔고 ‘가스스테이션’의 남자처럼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일을 한다(아, 물론 가족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일을 혼자서 한다는 얘기다). 또한 그의 그림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기차나 모텔이나 공항 같은, 오래된 인간적 삶의 집합적 기억이 상실된 익명의 공간들을 부유하였으며,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과연 나만 그런 것일까. 주위를 돌아보면, 호퍼의 그림에나 나올 법한 쓸쓸한 풍경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백화점의 지하 푸드코트에서 혼자 밥 먹는 사람, 꽉 막히는 도로에서 얼핏 백미러에 들어온 뒷차의 운전자, 지하철의 맞은편에 앉아 단잠에 곯아떨어진 사람, 혼잡한 빌딩의 뒷골목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 사람. 모두가 말이 없고 모두가 무표정하다. 기어코 이 도시는 호퍼가 수십 년 전에 미국 동부의 도시와 인간을 건조한 고독으로 그렸던, 그런 풍경으로 바뀐 것이다. 아마도 지금 당신 또한 호퍼의 그림과 같은 메마른 풍경의 일부가 되어 무심히 이 글을 읽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호퍼의 그림에 사무치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정윤수(1968- ) 성공회대 사회학 박사(수료). 오마이뉴스 문화스포츠 담당 편집위원, 풀로엮은집 사무국장, KBS N 축구 해설위원 역임. 현 스포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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