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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나의 미술사랑, 인연과 도전

오지철

초등학교시절 수십 차례 그려낸 그림은 입선은 커녕 교실 환경미화판에 조차 걸린 적이 없었다. 6년 동안의 미술실기 성적은 양·미로 도배되었다. 5학년때인가 삼촌이 대신 그려준 6·25 포스터가 교실 뒤 벽에 우수작으로 걸린 일이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었으나 졸업할 때까지 죄의식에 시달려야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나의 그림솜씨는 여전히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나마 미술사에 관한 암기로 근근히 낙제점수를 면해가던 나에게 뎃생 실력이나 색채감, 구도·원근법에 관한 지식은 차라리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형편없는 미술 실력과는 상관없이 그림에 대한 나의 사랑은 사실 6, 7세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내가 처음 만난 그림은 동네 이발소 벽에 걸려있던 밀레의 <만종>과 <이삭 줍기>였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평화롭고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을 주던 이 그림들을 나는 이발할때마다 늘 힐끔힐끔 쳐다보곤 하였다. 전쟁 직후, 어린 나에게는 모사화를 보는 것이 거의 유일한 문화 활동이었던 셈이다. 20대 후반, 첫 해외출장지로 파리를 방문하였을 때, 맨처음 찾은 곳이 밀레의 그림들이 전시되어있는 오르세미술관이었던 것은 아마 유년시절의 따뜻한 추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밀레를 향한 사랑은 미국 연수시절 보스턴에 도착하자마자 미술관으로 달려가 <씨 뿌리는 사람>을 보는 것으로까지 이어졌다.



국립현대미술관 사무국장 자리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약 15년간, 때로는 끼니마저 걸러가며 파리시내 온갖 미술관은 물론 오베르, 바르비종 등까지 원정, 작품 감상과 해설청취에 열을 올렸고 프랑스부터 시작된 나의 미술관 순례는 거의 모든 유럽 국가를 거쳐 아시아, 중남미, 아프리카까지 이어졌다. 방문하는 나라마다 미술관을 찾는 일에 무슨 큰 자랑스런 일이나 한 것처럼 가슴 뿌듯해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이 가상했던지 운명의 여신은 나에게 국립현대미술관 사무국장이라는 자리를 맡겨주었다. 7개월이라는 짧은 재직 기간 동안 내가 할 수 있고 또한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은 턱없이 부족한 소장 및 전시 작품수를 늘리기 위한작품구입예산 확보였다. 내가 이 과제 해결에 매달린 것은 일본 출장길에 들른 도쿄 우에노공원안의 국립서양미술관 컬렉션의 양과 질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미술 교과서에 등장하는 오랫동안 눈에 익은 밀레, 르느와르, 세잔느, 고갱, 고흐, 로댕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바로 이웃나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에 국립미술관 행정책임자로서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었다. 1994년 하반기 미술관 직원들과 함께 예산확보에 매달린 결과, 2배 이상 증액되었다. 그러나 부임하던 날 호기있게 펼쳐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이임하던 날까지 끝내 두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채 다시 도서실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미술관을 떠난 이후에도 회화, 조각, 사진, 설치미술 등에 관한 관심은 계속 커져갔다. 해외방문 중 아르메니아, 우즈베키스탄공화국, 세네갈, 도미니카공화국, 미얀마, 베트남과 같은 제3세계 국가들의 미술작품들이 이른바 문화선진국의 걸작 못지않게 각국의 특유한 역사, 문화와 얘기를 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은 큰 기쁨이었다. 이제는 TV 방송사의 경영자로서 우리 국민들이 TV프로그램을 통해 미술작품들과 더 가까워짐으로써 문화시민으로서 교양을 높이고 마음의 평안과 위안을 느낄 수 있도록 힘쓸 생각이다. 무엇보다 손녀와 그림 그리기도 함께 공부해볼 참이다. 미술에 대한 나의 본격적인 사랑과 도전은 지금부터라고 다짐해본다.



오지철(1949- ) 서울대 법학 박사. 황조근정 훈장, 올해의 공무원상 수상. 한국관광공사 사장, 문화관광부 차관 역임. 현 TV조선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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