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119)제4의 벽

박신양

니콜라이 레릭, 다섯 보물의 산, 1933, 캔버스에 템페라, 47×79cm, 
러시아 니콜라이레릭미술관 소장


나는 그 작품을 한동안 쳐다보다가 옆에 앉아계신 봉사자 할머니께 작가 이름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니콜라이 레릭(Николай Рерих, 1874-1947). 오랜 기간 티베트, 몽골, 인도를 여행했다고 알려진 작가. 그런 와중에 집필 활동과 강의도 한 교수이며 화가라고 했다.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지금도 그 지역은 여행이 쉽지 않은 곳이다. 더군다나 화구를 가지고 다니며 그림을 그려 이렇게 남기다니. 작품은 아름다웠다. 실재의 풍경도 훌륭했겠지만, 작가의 손에 의해 명암과 색의 온도가 오묘하게 변화한 그 풍경은 분주한 마음을 내려놓게 하고 깊은 명상으로 나를 인도했다. 러시아 유학 중 그렇게 만난 한점의 작품은 내 뇌리에 깊게 지금까지 남았다.
 
대학 졸업 후 러시아 유학을 떠났던 이유는 러시아가 스타니슬라프스키(Константи́н Станисла́вский)로 대표되는 ‘연기론’의 발원지이기 때문이었다. 졸업 후 몇몇 작품에 참여했지만 ‘연기’와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나 자신의 질문에 답을 구하고 싶었다.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한 직후였기에 “기존 체제가 무너진 세계에서 예술가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라는 호기심도 있었다. 모든 타지 생활이 그렇겠지만, 나의 유학 시기도 어려움을 감수해야했다. 한국에 돌아와 연기를 하던 어느날 그때 만났던 러시아 친구 키릴이 너무나 그리웠다. 물론 당장 만나러 갈 수 있었지만, 나는 나의 이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깊게 생각해 보고 싶었다. 함께 예술에 대해 마음껏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그 시간.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포기할 수도 없었다. 나는 친구의 얼굴을 그리며 생각을 정리해 갔다. 그림은 표현임과 동시에 내 사유의 한 수단이 되었고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배우로서의 활동은 어느덧 30년의 세월이 지나며 청년의 모습을 벗었다면, 내 그림은 이제 막 청년기에 접어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아직 모르겠는 것이 많음에도 시도해보고 싶은 표현은 셀 수 없다.

갑상샘항진증으로 하루에 30분도 서 있기 힘들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10여 년의 시간 동안 틈틈이 밤을 새워가며 그린 그림은 어느덧 작업실에서 내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다. 외부 소음으로 인해 환기가 어려웠던 상황 속에서 건강이 나빠져 3년 전에는 작업실을 서울에서 안동으로 옮겼다. 지금은 4월까지 평택의 mM아트센터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진행하고 있다. 전시는 내가 작업하는 공간인 1층과 1층을 내려다볼 수 있는 1.5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목은 ‘제4의 벽’, 연극에서 무대와 관객석을 구분하는 가상의 벽으로 이번 전시에서는 1층과 2층 사이의 안보이는 선-벽이다. 이 선-벽을 전시하고자 했으며 그럼으로써 우리가 매일 직면하는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 대해 다시 물음을 통해서 ‘나’를 바라보는 흥미로운 방식을 제시하고자 했다.

항진증과 함께 나를 종종 당황스럽게 했던 일이 하나 더 있다. “저 그림을 과연 박신양이 그렸을까?”라는 난데없는 질문들이었다. 작업실에서 오랜 시간 나와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 뒤돌아서서 툭 던졌던 말들은 당혹감 자체였다. 하지만 되돌아보면서 나빴던 건강도 어떤 종류의 선입견도 내가 그림을 놓치 않고 그릴 수 있게 해주었던 원동력으로 소화하려고 한다. 내가 오랜 시간 붙잡고 있었고 나의 첫 영화의 원작이기도 한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1975)의 한 구절이다.

“삶은, 슬프지만 깊은 노래이거늘, 작용력이란 보지 않아도 추악한 것이어서 그 추악함으로 존재의 아름다움을 질투하여, 수줍은 듯이 반짝이며 소망으로 음탕하던 눈엔 먼지와 거미줄을 얹고 …” 


- 박신양(1968- ) 동국대 연극학 학사, 안동대 미술학과 석사, 서강대 철학과 석사. 1997 ‘편지’, 2004 ‘파리의 연인’, 2008 ‘바람의 화원’ 등 드라마 및 영화 주연 다수. 1996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 2004 SBS 연기대상 대상 등 수상. 『제4의 벽』(민음사, 2023) 발간.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