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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강릉 선교장

이기웅

‘나의 미술’은 많이 다르다. 내 생각 안에 자리하고 있는 ‘미술’이란 개념은 세간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확연히 달라, 남과 이 문제를 놓고 논의한다는 사실 자체가 여간 고역스런 일이 아니다. 미술 뿐아니라 다른 분야, 내가 종사하는 ‘책’에서도 그러하다. 그런데, 김달진 선생이 ‘미술’에 대한 나의 생각을 얘기해 달란다. 그것도 아주 자유롭게. 어쩌면 나의 견해를 밝힐 좋은 기회란 생각이 들었다. 여기 피력하고자 하는 나의 글이 설득력 있어서 많은 이들과 소통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나의 생각은 사뭇 진지해진 상태다. 내 안의 미술은 어떤 모습일까.



정확히 말하면, 나는 1940년 서울 성북동에서 태어났다. 당시 대장원(大莊園)이었던 강릉 선교장(船橋莊) 우리집은 나의 조모 청풍(淸風) 김씨(金氏)께서 살림을 보살피셨고, 조부 이근우(李根宇) 님께서는 거대한 장원을 거느리고 다가오는 새 기운〔開化〕을 꿈꾸면서, 서울 재동(齋洞) 집을 거점으로 활용하셨다. 규모가 매우 큰 이 한옥집엔 나의 서조모(庶祖母)이신 평창(平昌) 이씨(李氏)가 머물면서, 서울로 유학 온 집안의 차세대 젊은이들을 책임지고 엄격히 거느리셨다. 조부께서는 이 두 거점을 오르내리면서, 재동 집은 신문물과 새 교육의 흡수 창구로, 선교장은 경제력을 확보하면서 집안의 정체성을 확고히 지키는 보루로 운용하셨던 것이다.


1920년 무렵 어린 아버지가 선교장을 떠나 머나먼 서울의 서모 무릎에서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마치신다. 당초 서조모께서는 조선조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궁녀였다. 그분이 연세가 들자 궁정에서는 그때까지 순결을 지키며 성실히 일해 온 이 궁녀의 노고를 위로하고 노후를 보장하는 뜻에서, 믿을 만한 대가(大家)의 주인에게 맡기는 풍속에 따라 우리 집안으로 오신 터였다. 서조모는 몸에 밴 궁궐 예법과 철인과 같은 엄격함으로 아버님을 비롯한 차세대 젊은이들을 가르치셨다. 아버지가 대학(경성치전)을 졸업하고 처음 개업한 병원이 세칭 혜화동(惠化洞) 로타리였으므로, 아버지는 병원과도 가깝고 재동 집과도 가까운 성북동에 첫 살림집을 마련하셨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1938년 조부께서 갑자기 돌아가시고, 1943년 무렵 태평양전쟁이 치열해지자, 불안을 느끼신 아버지는 맏형 이돈의(李敦儀)님과 상의 끝에 선교장으로의 낙향을 결심하신다. 네 살 된 나는 아버지에게 안겨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내려온다. 이때부터 어린 나의 강릉 선교장 생활이 시작된다.


선교장은 그 전부가 나의 미술이었다. 균형잡히고 조화로운, 그리고 절제와 사랑으로 충만한 미술이었다. 세 살부터 열아홉 살까지 열일곱 해의 내 유소년 시절의 선교장 삶은 생활미술의 세계였다. 선교장의 건축공간과 그 안에 갖추어 있는 가구며 도구들은 면면히 이어 온 공간연출의 원리와 조영(造營)의 기술에 따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 안에서 뛰놀며 자랐다. 건물마다, 방마다 걸려 있는 현액(懸額)과 족자(簇子), 기둥에 가지런히 붙은 주련(柱聯)과 그 안에 씌어진 뜻깊은 문자나 글씨, 그리고 그림들은 주위의 정원들과 잘 어울려, 마음의 균형을 잡아 준다. 그 시서화(詩書畵)에 드러나는 조형적 아름다움과 의미의 심장함은 우리를 격조높은 세계로 이끌어 주었다. 집안 도처에 추사(秋史)와 단원(檀園)과 사임당(師任堂)이 있었다. 서가(書架)마다 아름다운 서책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던 열화당(悅話堂)의 풍경도 회상해 본다.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정원수(庭園樹)들의 꽃과 열매는 자연과 삶의 천리(天理)를 소리없이 일깨워 주었다. 사실 선교장은 조선조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그 가계(家系)를 지켜 온 역대 주인들이 시대의 진운(進運)에 지혜롭게 반응한 흔적들임을 나는 안다. 특히 이근우 할아버님은 최성기(最盛期)의 집안을 일구시면서, 격동의 근현대사 속에서 어떻게 하면 인간의 삶으로 충만한, 절제와 균형과 조화와 사랑으로 잘 가꾸어진 삶터를 존재케 하느냐를 꿈꾸신 분이다. 선교장이 바로 그것을 내게 가르쳤음을 지금 깨닫고 있다. 신문명을 꿈꾸셨던 조부 덕분에 나라에서도 변방인 강릉땅 선교장에는 새 시대의 산물들이 고루 갖춰지고 있었다. 잘 디자인된 전기기기, 음향기기들이 우리의 전통 가구들과 어우러지게 놓여 있던 풍경은, 마치 고전주의와 모더니즘이 잘 어울리는 모습이라고 할까, 유니크한 미술을 연출하고 있었다.


미술(예술)이 오늘의 모습으로 존재하게 된 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낳은 현상으로서이다. 인간 욕구의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하자. 그러면 예술 또는 미술이 지향하는 바 진(眞) 선(善) 미(美)에의 가치추구는 어찌할 것인가. 단순 상품으로서의 예술 또는 예술품이 넘쳐나고 있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고? 아니다. 예술의 다다익선은 인간파괴의 지름길이다. 예술시장에 구제역(口蹄疫)이 찾아올 것이다. 이제 그 기미가 느껴진다. 인간이 탐욕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곧 예술이 시장지상주의에 매몰될 때 그 명운(命運)은 자명할 것이다. 예술은 삶에서 우러나는 것이며, 삶에서 유리되는 순간 그 생명력은 끊어진다. ‘삶의 예술’, ‘삶과 함께하는 예술’ 그것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선교장 미술학교’가 가르쳐준 미술교육이었다.



이기웅(1940- ) 성균관대 철학 학사. 현 열화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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