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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내가 그린 그림과 ‘Berlinart 1961~87’

이성미

“60. 9.” 요행히도 살아남은 나의 유화 작품에 적힌 연대이다. 실로 오래 전 필자의 서울 미대 3학년 때 그림으로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편의상 <모델>로 부르겠다. 이 작품을 국전에 출품하고 당선 소식을 명동 길에서 일간지를 사보고 알게 되었을 때 남의 시선을 의식할 겨를도 없이 애인(지금의 남편)의 팔을 잡고 깡충깡충 뛰며 좋아했다. 그런데 마침 지나가는 버스에 타셨던 그의 고모님이 보시고 좀 언짢게 생각하셨다고 한다. 당시에 필자를 포함한 많은 화학도(畵學徒)들이 비싼 유화용 캔버스를 사서 쓰는 대신 각자가 재량껏 만들어 사용하였다. 동대문 시장에 가서 미군용 모래 포대를 사다가 실을 뜯어 평면으로 만들고 그리고자하는 크기에 따라 재봉틀로 이어 큰 헝겊을 만드는 일 까지는 필자의 몫이었다. 목공소에 가서 각목을 사다가 톱질과 못질로 틀을 만든 다음 이어놓은 모래 포대 감을 팽팽하게 틀에 입히고 그 위에 아교와 흰 페인트칠을 하는 것은 나의 애인의 몫이었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캔버스에 그린 것이 바로 이 그림이다.



내가 그린 그림

집에는 대학 4학년 때(1961) 그린 좀 작은 누드 유화 한 점이, 한국학 중앙연구원에는 약 40호 크기의 여인 좌상 한 점이 더 남아 있다. 이 그림들 역시 그와 같은 캔버스에 그린 것이다. 대학 졸업 후 미국유학을 떠날 때 수많은 캔버스들이 집에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한옥의 어디 걸어두고 볼 수도 없는 큰 작품들, 그리고 부모님 취향에도 맞으시지 않는 그림들을 더 이상 보관하기 불편하셔서 이사하면서 모두 버리셨다고 한다. 우리는 당시 약혼만 한 상태로 각각 유학을 갔는데 지금 남은 세 작품들은 미래의 시댁에 보냈던 것들이다. 귀국 후 찾아다가 60호 크기인 국전 작품 <모델>은 나의 처음 직장이었던 덕성여대 내 연구실, 그리고 1989년 정문연(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직장을 옮긴 후 그 곳의 넓은 조교실 벽에 걸어두었었다.


국사학자이셨던 선친께서는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열심히 그림 그리는 것을 지켜보시기만 하셨는데 대학 진학을 앞두고 미술대학에 가겠다는 말씀을 드렸을 때는 약간의 반대의사를 표명하셨다. “한산(韓山)이씨 학자 집안에서 환쟁이가 나와서야 되겠니”하시는 것이었다. 내 뜻을 굽히지 않자 할 수 없이 허락은 하셨는데 대학에 들어와 야수파(野獸派)를 방불케 하는 그림으로 일관하자“너는 왜 김인승 화백같이 그릴줄 모르니”하시며 한 번 더 불만을 표시하셨다. 


당시 우리는 사진과 같은 사실적 그림은 되도록 멀리하고 큼직한 필치로 자유분방하게, 그리고 색채도 자연색을 무시하며 표현주의(German Expressionism)를 모방하기도 하였다. 선친의 친구기도 하셨던 고(故) 장욱진(張旭鎭) 화백의 강의를 같이 들었던 학우(學友) 손혜영과 임숙희, 그리고 필자는 장교수님과 더불어 동숭동 막걸리 집에서 노란 양은 주전자로 막걸리를 따라 사제지간의 격식을 차릴 것도 없이 같이 한잔하기도 하였다. 우리들의 그림에 어울리는 분위기라고 자부하면서! 물론 담배를 피우기도 하였다.


대학시절 아방가르드를 자칭하였으나 대학 졸업 후 그림 그리기를 접고 미국유학시절부터는 미술사를 공부하여 오늘에 이른 필자에게 뜻밖의 일이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1987년 뉴욕 MOMA에서‘Berlinart 1961-87’전을 관람하게 된 것이었다. 이 전시를 보며 대학시절의 우리는 멀리 베를린에서 어떤 그림들이 그려지는지 알지도 못했으면서 그 그림들과 매우 유사한 분위기의 그림을 그렸던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신기하고 반가웠는지! 이제 이 그림이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이라는 새 집으로 가게 되어 감회가 새롭다



이성미(1939- ) 미국 프린스턴대 미술사 박사. 우현상(1997), 한국미술저작상(2009) 수상. 현 한국학중앙연구원(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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