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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이인성(李仁星)의 초기 수채화 작품 <풍경>(1931)의 발견

김동화


이인성, 풍경, 1931, 종이 위에 수채, 20×25.5cm

재작년(2016) 12월에는 경매회사들의 겨울 경매가 연이어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한 옥션의 오프라인 경매 프리뷰를 보러 나갔다가 또 다른 온라인 경매 프리뷰도 바로 옆 건물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잠시 거길 들러 한번 휙 둘러보고 바로 나가려다가 입구 쪽에 걸려 있던 어떤 그림 앞에서 나도 모르게 얼어붙듯 시선이 멎어버렸다. 그 그림은 녹색과 갈색조의 대지 위로 광주리를 머리에 인 누이와 어린 동생이 함께 수숫대 옆을 지나고 있는 장면을 그린 소품 수채화였다. 


대기를 스치는 청명한 바람의 기운이 생생하게 감지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바람에 흔들리는 수숫대의 움직임 역시 천연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림 속 모든 터치에서 실로 붓이 두 번 간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근대적 기분이 물씬한, 일제강점기 시절의 보기 드문 수품(秀品)임에 틀림이 없어 보였는데, 화면의 한쪽에는 세필의 붉은 글씨로 ‘1931 仁星 画’라는 연기와 서명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인성’이 아닌 ‘전(傳) 이인성’으로 출품되어 있었다.



작품 뒷면

직감적으로 나는 이 그림을 이인성의 것으로 확신했지만 뭔가 좀 더 객관적인 증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보았고 그래서 직원을 통해 소장자의 허락을 얻어 액자를 분리해 그림의 뒷면을 확인해 보았다. 일견 특별한 내용은 없는 듯 보였지만 단 한 가지, 그림 뒷면 네 귀퉁이 각각에 붉은 바탕색의 태그(Tag)가 하나씩 붙어있었다. 그 동일한 네 개의 태그 중 두 개에서는 부분적이나마 인쇄된 내용이 무엇인지가 식별 가능했다. 그중 하나에는 ‘茂英堂 本町’이라는 글자가, 나머지 하나에는 건물과 그 위로 나부끼는 깃발의 도상이 함께 찍혀져 있었다.

나는 ‘무영당 본정’ 이 다섯 글자를 확인하는 순간, 온몸이 떨리는 짜릿짜릿한 전율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원래 무영당(茂英堂)은 개성 사람 이근무(李根茂)가 1923년 대구에 설립한 서점이었는데, 후에 그 사세가 크게 번창해 백화점으로 확장, 변신하게 되었고 다시 1937년에는 본래 영업을 하던 바로 그 자리(서문로1가 58번지)에 5층으로 건물을 신축하게 된다. 

이 건물은 지금까지도 같은 자리에 원래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데, 지금의 서문로 일대는 일제강점기 대구지역 최고의 상권이자 번화가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이 지역을 혼마치(本町)라 불렀다. 그러므로 이 태그에 인쇄되어 있는 건물이 무영당백화점임은 물론, 그 외관을 백화점의 로고로 사용한 사실까지도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뿐 아니다. 이근무는 1930년대 당시 향토회전(鄕土會展)을 후원했을 뿐 아니라 이인성, 김용조(金龍祚), 윤복진(尹福鎭), 박태준(朴泰俊) 등의 대구 문화예술계 인사들 대부분과 깊은 교분이 있었던 당대의 저명한 패트런이기도 했다. 또한 그에 더하여 백화점 2층의 한 코너는 전시장으로 꾸며져, 작품 발표회의 긴요한 장으로 활용되기도 했었다.

이러한 정황을 종합하면 이 작품은 분명히 1930년대 당시의 그림이며, 무영당백화점의 전시장을 거쳐서 거래가 된 것으로 정확히 그 유통의 프로비넌스를 비정(比定)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인성의 당대 지인인 이근무가 작가 서명이 있는 안품(贋品)을 자신의 상점에서 판매했을 리가 만무하므로, 그 진위의 여부는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그림은 이인성의 또 다른 1931년 작 수채화인 <풍경>(56.5×77.5cm)과 색채의 사용 및 필세의 느낌이 거의 유사하며, 1930년 작인 화첩 <운상>에 등장하는 소재들 중 일부와도 그 내용이 거의 방불하다.

이처럼 그림과 관련된 아주 사소한 내막이나 붙어 있는 작은 액세서리 하나라 할지라도 그것을 꼼꼼하게 챙겨보는 가운데 극히 중요한 미술사적 지식의 단초를 얻을 수 있게 됨은 물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미술품을 발견하게 되는 의외의 특별한 계기를 얻을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 김동화(1969- ) 연세대 의과대학 대학원 박사, 정신과 전문의(세브란스병원 정신과 전공의 수료). 미술 비평 및 미술사 연구를 겸하고 있다. 『화골(畵骨)-한 정신과 의사의 드로잉 컬렉션』(경당, 2007), 『줄탁(啐啄)』(비온후, 2014), 『쓰리스타쑈』(인디프레스, 2015), 『FROM POINT TO PENTAGON』(인디프레스, 2016) 등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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