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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고향에서 박물관 노동과 미술관 힐링

이종철

돌이켜 보건데 박물관인으로서, 큐레이터로서 안분(安分)하면서 즐거움을 누렸던 평생이 고맙고 고맙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특히 1995년 12월1일부터 전주에서 근무하며 맛보았던 경험은 두고두고 기억된다.

1996년 전북의 대표적 중견 기업인 (주)쌍방울이 무주 동계올림픽 시설에 투자하던 중 재정 압박에 부도가 나면서 무주 전주 유니버시아드는 적지 않은 위기가 닥쳤다. 급히 구원투수로 나선 국립전주박물관은 대표적 문화축전인 ‘한국 눈 그림 600년’전을 기획하여 조선 전기의 작가에서 현존하는 전북 작가들까지의 설경전(雪景展)을 준비하였다. 역사의 과거와 현재의 소통으로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서화의 대가들과 살아있는 20여 작가들의 명작인 ‘눈 그림’을 주제로 한 전시이다. 이때 국보180호인 김정희의 명작 <세한도(歲寒圖)>의 전주 나들이를 기획하였다. 1974년 12월 31일 국보 지정 당시 잠깐 전시되었다가 일반인에게 거의 공개되지 않았던 추사의 <세한도>, 모두가 실견하기를 고대한 작품이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소장자 손창근 선생님과 오랜 친교가 깊은 국립중앙박물관 이원복 미술부장께 간청하여 20여 년만에 보통사람들이 사는 전주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문화적 사건에 버금간 이 전시는 호남문화의 뿌리, 예향 전주를 대한민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추사 김정희, 세한도, 1844, 국보 180호 수묵화, 23×69.2cm, 국립중앙박물관
날이 차가워진(歲寒) 이후라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도록 지지 않는다는 선비의 기상과 시대정신을 담은 걸작


흰 눈이 하얗게 내린 유배의 땅에 토담집 하나, 집 주변 네 그루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려진 절대 여백을 살린 수묵화. 1840년부터 1848년까지 제주에 유배된 조선 최고의 명필인 추사를 젊음의 올림피아드가 뜨겁게 타오르는 전주에 150여 년만의 초대한 것이다. 외로움이 가슴을 멈추도록 밀려오는 유배지에 와 있던 선생을 성실한 사모의 정으로 돌봐준 제자 ‘이상적’에게 진실한 우정을 담아 남겨준 문자향 서권기가 넘치는 걸작 속의 걸작을 세계의 젊은 대학생에게 선물한 것이다.

지방과 중앙의 신문방송 매체를 타고 추사의 <세한도>는 전라도는 물론 서울, 경기, 충청, 경상의 미술애호가와 국민의 문화 사랑에 불을 붙여 전주의 향토 음식인 콩나물국밥과 비빔밥은 주말의 맛 자랑을 뽐내었다. 외지 관광객의 성화에 못 이겨 남전주 톨게이트에 국립전주박물관 안내표지가 등장하고, 전주 중심가의 수많은 도로표지판의 모악산 교도소 글자는 전주박물관으로 모두 바뀌는 기쁨을 주었다.

언제나 느끼는 일상이지만 큐레이터의 직업상 박물관 관람은 공부나 수업으로 생각되어 박물관 피로(Museum fatigue)를 준다. 현장조사에 앞서 도록과 자료를 챙기고 예습과 복습, 촬영, 메모를 정리하며 공부하여야 한다. 그러나 마음의 안정과 힐링을 위한 갤러리나 미술관의 탐방은 누구에게나 쉬고 놀면서 즐기는 참 감동을 준다. 박물관 피로는 당연히 지불해야 하는 고귀한 대가이고, 이에 부응하는 가치는 지대하다. 박물관에서의 관람 시간은 예술적 소양은 물론 지식과 지혜, 생각의 멈춤을 주는 울림의 시간이며, 소통과 명상의 시간이 된다. 그러므로 박물관은 영감을 일깨우는 기쁨을 한없이 준다. 그야말로 예에서 노니는[遊於藝]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그런 기쁨이다.

이제 세월이 지나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연인이 되고 보니 새삼 꿈이 솟는다. 예술을 보는 안목과 안격을 높이기 위하여 명작들을 되도록 많이 보고, 생각하며 이론서도 읽어야겠다. 시간을 투자하여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탐독하고, 유홍준의 회화를 보는 ‘안격’도 빌려야겠다. 최근에 얼핏 목차만 읽은 루브르박물관 미술사학자이자 비평가인 르네위그의 『보이는 것과의 대화』(서울대 불문과 교수 곽광수 번역) 등을 읽으며 놀고 즐기면서 인생의 예정 마침 목록(Ending list)을 채워가고 싶다. 생물학적인 인생의 종말은 어쩔 수 없다지만 감성의 예술을 생활 속에 즐기고 놀면서 공부하다 보면 예술, 학문, 남은 인생 또한 멈춤이 없는 이야기(Never ending story)를 가진 격조와 아름다움 속에 마무리되지 않을까?


이종철 / 전 국립민속박물관장 jcrhie44@daum.net
- 이종철(1944- ) 서울대 문리대 고고인류학과 학사, 영남대 대학원 민속학 석사, 사회인류학 박사. 국립민속박물관장(1986-94, 1998-2003), 한국전통문화대 2, 3대 총장(2003-09) 역임. 문화재청 한국민속박물관 개관(1975.4.23)과 문화부 국립민속박물관 개관(1992.2.13), 서울시 한성백제박물관 개관(2012.4.30) 기획 참여. 『한국의 성숭배 문화』(2003)『, 한국 민속신앙의 탐구』(2009)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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