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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겼을 때

신현림

덴마크 루이지애나현대미술관에서


나는 중학교 때부터 자코메티를 좋아했다. 존재의 본질을 드러낸 뼈가 앙상한 조각품보다 그의 그림에 끌렸다. 감각의 깊이가 뭔지 보여준 회화작품은 현대인의 불안과 외로움을 신랄하게 파고든다. 그림만큼이나 그의 마지막 사랑이 인상이 깊었다.
자코메티가 카롤린은 만난 건 자신의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을 때였다. 자코메티는 스무 살이 채 안 된 카롤린에게서 헤매듯 쓸쓸한 눈빛을 보았다. 서로 첫눈에 사랑하게 되었다. 카롤린은 자코메티의 예술혼을 타오르게 하였다. 어쩔 수 없이 술집에서 일하던 어린 카롤린에게도 자코메티는 새 세상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모델을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후 서로가 함께하려고 늘 찾고 매달렸다. 1966년 자코메티가 세상 떠날 때까지 8년간의 사랑의 여행은 멈추지 않았다.

20세기 최고의 예술가였던 만큼 그의 작업실은 늘 손님들이 오갔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즐겨 찾던 몽파르나스의 술집 ‘셰 아드리엥’은 그의 피난처였다. 그는 그곳에서 커피나 샴페인을 마시고, 읽던 신문, 편지 봉투에 볼펜으로 데생하였다. 또한 여자들과 늦도록 온갖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는 밤늦도록 자기와 있느라 시간을 내준 그녀들에게 택시비를 쥐여주기도 했다. 카롤린은 늘 회색 먼지 속에서 작업하는 자코메티를 ‘나의 그리자유’라고 불렀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했을 자코메티는 카롤린을 데리고 루브르박물관, 그리고 자연사박물관, 런던 테이트갤러리에도 갔다. 당시 영국을 뒤흔들던 아일랜드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에게도 카롤린을 소개했다. 둘이 사랑하는 것을 그의 부인 아네트와 동생 디에고도 알았고, 카롤린도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했을 때의 당신은 어떠한가. 나이와 상관없이 저마다 마지막이란 느낌의 강렬한 시기가 있을 것이다.

내 나이 서른 살 때
내게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느꼈던 가장 격렬한 시기가 서른 살 때였던 거 같다. 죽음의식에 시달렸기에 미친 듯이 열심히 살았다. 아래 시.. 보부아르의 말을 거울에 붙여놓고 시간 아껴 미친 듯이 책 읽고 작업했었다. 주말, 주일, 국경일도 쉬지 않고 사진을 찍던가 시를 썼다. 지나보니 그렇게 온전히 나 자신에게 바치는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더라. 그렇게 온전히 자기에게 바치던 시간이 흔치 않은 줄 알았다면 이후 시간들도 훨씬 더 치열하게 보내지 않았을까 아쉬워한다. 나는 지금 내 젊은 날의 시집-『세기말 블루스』 <긴장시키는 메모> 中에서 일부를 또 되뇌임으로써 좀 더 강해질 것만 같다.

   순간순간을 유효하게 사용했다 잠을 덜 잤다.
   몸치장도 대강대강 거울 들여다보는 일도 없어졌다
   … 이 닦기도 겨우 했다 손톱 소제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경박한 독서, 무의미한 수다, 모든 오락을 끊었다

   알 수 없는 우주 속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없이 노력하는 것뿐

   자물쇠를 여는 열쇠처럼 힘을 부르고
   나를 끌고 다니는 슬픔을 한 방에 날려버린다

   작은 메모가 네게도 긴장을 주리라
   오래된 메모가 나를 강하게 해주었듯
   네게도 각성과 눈부신 정열을 주리라

마음이 밝으면 일도 더욱 좋아진다. 기쁘거나 즐겁게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일의 능력이 커진다. 좋은 생각만을 하자. 뭐든 순조롭게 펼쳐갈 힘을 얻을 것이다.


- 신현림(1961- ) 상명대 디자인대학원 사진학과(파인아트) 석사. 현대시학 <초록 말을 타고, 문득>으로 등단(1990). 시집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세기말 블루스』, 『해질녁에 아픈 사람』, 영상에세이 『나의 아름다운 창』, 『신현림의 너무 매혹적인 현대 미술』, 치유성장에세이 『만나라, 사랑할 시간이 없다』 등. ‘아我! 인생찬란 유구무언’, ‘사과여행’, ‘사과,날다’ 등 사진전 개최. ‘사과밭사진전’으로 2012년 울산국제사진페스티벌 한국작가대표로 선정. SCAF아트페어 초대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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