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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쓸모없는 일에의 동경

노재현

박희선(1956-97), 통일, 1996, 춘양목, 105×30×80cm, 개인소장.


아마 중학교 때 미술 교과서였던 듯하다. 앵그르의 <샘> 그림이 있었다. 요즘에야 여성의 벗은 몸 이미지가 인터넷에 넘치게 돌아다니지만, 1970년대 초반 지방 소도시에서는 귀하디귀한 사진이었다. 미술교과서에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머리카락과 손으로 특정 부위를 가리고 있어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그림이었다. 갓 사춘기에 들어선 까까머리의 성적 호기심을 합법적·교육적으로 다독거려 준 미술교과서에 나는 지금도 고마움을 느낀다.

리비도 영역뿐이었을까. 어른들의 눈총, 사회 상규(常規), 다들 옳다는 공식, 빤한 레일 위를 달리는 삶 따위에 의심이 들거나 질리거나 지겨워질 때, 미술 또는 미술 하는 이들의 도움을 받은 기억들을 갖고 있다. 나는 대학시절 별 이유 없이(물론 지금 생각하면) 두 차례 휴학을 하고 고향 춘천에서 ‘전원’이라는 클래식 음악 다방의 DJ를 했다. 지금도 활발히 활동 중인 김춘배·김대영 화백은 나와 고교 선후배 사이였다. 한동안 김춘배 형과 저녁마다 후배 김대영의 화실에 가서 술 마시고 떠들다 아무렇게나 잠들곤 했다. 그 시절 만난 또다른 선배가 당시 소양강 가에 작업실을 갖고 있던 조각가 故 박희선(1956-97)의 형이다. 정물용 북어·사과까지 안줏감으로 거덜 내며 그토록 많은 술을 마시면서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굳이 표현하자면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의 한 구절쯤 될까.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작가이자 화가인 이제하의 첫 창작집 『초식』(1973)도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예를 들어 단편 『유자약전』에서 주인공 유자는 독일 출신 화가 얀 보스(Jan VOSS)의 작품 <순간의 환희>를 우연히 외국 잡지에서 보고 “이 망할 자식이… 나보다 먼저 그려버렸어”라며 머리를 움켜쥐고 절망한다(그 이제하를 수십 년 후 그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어느덧 나도 남의 눈총과 제반 상규를 의식하고, 레일 한 가닥에 올라타 혹여 궤도라도 벗어날세라 쭈뼛거리며 지내는 생활인이 되었다. 그렇더라도 남들이 쓸모없다고 하는 일,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은 아직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다. 미술, 요샛말로 시각예술이 특히 그렇다. 일본여행을 자주 하는 편이고 웬만하면 여행지 부근 미술관을 찾는다. 일본의 풍부한 미술 감상 인프라는 정말 부러울 정도다. 하코네 조각의숲미술관, 가나자와21세기미술관, 도와다현대미술관, 그 외 많은 공·사립미술관들을 다녔다.

산업폐기물 처리장이던 섬 전체가 미술관으로 변신한 나오시마도 두 번 찾았고, 이 일대 12개 섬에서 열리는 세토우치트리엔날레 기간에 맞춰 배를 타고 섬들을 돌아다닌 적도 있다. 나오시마의 지추(地中)미술관에 있는 클로드 모네 작품 전시실에 들어가려면 무슨 성지순례라도 하듯 절차가 대단히 까다롭다. 그에 못지않게 경건한 자세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게 되어있는 데시마아트뮤지엄의 횅한 바닥에서 조금씩 솟아오른 물방울이 서서히 흐름을 형성하며 이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미술은 참 재미있는 고등사기라고 생각했다. “예술은 진리가 아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거짓말이다”라는 피카소의 말이 맞았다.

나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미술을 찾는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쓸모가 없어야 하고, 수상쩍고 불온해야 하고, 정해진 잣대로 측정하기 어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술의 그런 특징이 나에게 새로운 시선과 새로운 느낌을 선물한다. 물론 미술관에 갈 때는 그런 선물을 받을 거라는 익숙한 기대가 이번에는 보기 좋게 배반당했으면 하는 또 다른 ‘기대’도 하지만...


- 노재현(1958- ) 서울대 국어교육학과 졸업,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중앙북스 대표이사 역임. 『나를 깨우는 서늘한 말』(중앙북스, 2015) 등 저술. 현재 : 신문유통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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