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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음악과 미술 사이에서

이장직



앙겔리카 카우프만, 음악과 미술 사이에서 방황하는 자화상, 1791, 캔버스에 유채,
215.9×147.3㎝, 모스크바 푸시킨미술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피아노를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 같다. 처음엔 교회 풍금을 호기심에 만지작거리다 그 소리에 매료되어 지금껏 음악계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다. 4학년 때부터는 서예반에서 붓글씨를 배웠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교육청 주최 대회에 나가서 ‘자주국방 총력안보’ 여덟 자를 쓴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컴퓨터 자판으로 글자를 두드리게 되면서 실력 발휘를 할 기회가 별로 없지만 글씨는 곧잘 쓰는 편이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그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미술 시간이 가장 지겨웠다. 내가 졸업한 대학은 음대와 미대가 바로 옆 건물이었는데도 미술은 전혀 딴 세상이었다. 

내가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기자 시절 외국 출장을 가면서부터다. 공연 관람을 하려면 저녁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낮에는 미술관이나 박물관 관람을 하는 것이 당연한 코스처럼 되어 버렸다. 하지만 원래 그림에 대한 취미도 없는데다 시간도 없어 악기가 나오는 그림만 유심히 보기로 했다. 

음악학에는 그림을 통해 음악을 연구하는 음악도상학이라는 분야가 있다. 음악을 소재로 한 그림만 모아놓은 데이터베이스도 있다. 음악과 미술은 알고 보니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초상화에 등장하는 악기는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매우 깊은 뜻이 담겨 있는 상징이자 알레고리이다. 음악의 알레고리는 그림에서 젊고 매력적인 여성으로 자주 등장한다.

음악과 미술 사이에서 갈등을 겪은 작가도 있다. 스위스 태생으로 런던, 로마 등지에서 활동한 여성화가 앙겔리카 카우프만(1741-1807)은 한때 음악가가 되려고 했다. 18세기 유럽에서 여성이 음악이나 미술을 취미라면 몰라도 직업으로 선택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화가의 딸로 태어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서양미술사에 등장하는 여류 화가들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카우프만은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웠고 어머니에게는 음악과 작문을 배웠다. 외동딸의 비상한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는 딸 뒷바라지에 매진하기로 결심한다. 딸을 데리고 밀라노, 파르마, 볼로냐, 피렌체, 로마, 나폴리, 베네치아를 돌면서 그림 공부를 시켰다. 상류층과 교제를 나누면서 인맥을 넓혀갔다. 1766년에는 영국에 진출해 1781년까지 런던에 스튜디오를 냈다.

모스크바 푸시킨미술관이 소장 중인 <음악과 미술 사이에서 방황하는 자화상>은 카우프만이 화가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54세 때 소녀 시절을 돌아보며 그린 유화다. 그림에는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하는데 진로를 결정하지 못해 고민하는 소녀를 중심으로 좌우에 분열된 자아가 등장한다. 왼쪽은 악보를 든 음악가, 오른쪽은 붓과 팔레트를 든 화가다. 미술은 오른손으로 그리스 신전의 기둥이 보이는 파르나수스 산을 가리키고 있다. 화가의 길은 멀고도 가파르고 험난한 좁은 오솔길이다. 그늘을 만들어줄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다. 음악가의 길은 안락한 삶이다. 음악의 배경이 되는 커튼과 기둥은 안정감을 준다. 카우프만은 음악의 여신과 손을 잡고 눈을 맞추고 있지만, 이것은 음악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 아쉬운 작별 인사다. 카우프만의 가슴은 이미 미술 쪽을 향하고 있다.

어머니는 딸이 덜 고달픈 음악가의 길을 가기 원했지만 카우프만은 평소 존경하던 가톨릭 신부에게 상담한 결과 화가의 길을 택했다. 음악가의 명성은 금세 사라지겠지만, 화가의 명성은 오래 갈 것이라는 신부의 말을 귀담아들었기 때문이다. 신부는 오페라 가수가 되면 돈은 많이 벌겠지만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18세기 기독교에서는 무대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순결과 거리가 멀다는 선입견이 팽배했다. 자화상을 그릴 때쯤 카우프만은 유럽에서 꽤 잘 나가던 초상화 작가였다. 카우프만이 가수가 되었다면 연주자보다 작곡가를 더 높이 평가하는 음악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겠지만, 화가가 된 덕분에 그림을 통해 후세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있는 게 아닐까.


- 이장직(1962- ) 서울대 대학원 음악학 박사. 전 중앙일보 음악전문기자. 저서 『음악회 가려면 정장 입어야 하나요』(서울대출판문화원, 2012)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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