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79)희망은 가장 마지막에 사라진다

양민아



이반 아이바좁스키, 9번째 파도, 1850, 캔버스에 유화, 221×332cm,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미술관 소장



우리에게 멀고도 가까운 러시아로 유학길에 오른 후, 10여 년 동안 오롯이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숱한 힘든 일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희망은 가장 마지막에 사라지는 거야(Надежда умирает последней)”라고 말하며 실의에 빠진 나를 격려해 주곤 했다. 이 러시아 속담은 “우리가 모두 죽더라도 희망은 마지막까지 남아있는다”라는 뜻으로 “우리 곁에는 항상 희망이 함께하고 있으니, 절대로 포기하지 말자” 즉,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희망을 잃지 말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친구들의 격려와 관심이 1년의 반이 겨울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유학생활을 버티게 해 준 큰 힘이었다. 고된 타지생활의 큰 버팀목이 되어준 또 하나 마음의 안식처가 있다. 바로 러시아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반 아이바좁스키(Ива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Айвазовский, 1817-1900)의 <9번째 파도>라는 그림이다. 사실 나는 러시아로 유학 가기 전까지 미술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미술에는 문외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내가 이러한 러시아의 명작을 마음의 안식처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 문화예술의 중심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부하며 틈틈이 다양한 러시아예술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바좁스키의 <9번째 파도>에서는 파도치는 망망대해에서 난파선에 겨우 몸을 기대고 있는 조난당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은 “9번째 파도”라 불리는 거대한 폭풍과 밤새 사투를 벌이고 몹시 지쳐있다. 그들 중에는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구조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모든 희망을 저버린 채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포자기하거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어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의 태도는 각기 다르다. 그러한 그들 앞에 붉은 태양이 떠오른다. 이 붉은 태양은 그들에게 다시 한 번 9번째 파도를 이겨낼 힘을 주는 희망일 것이다.

내가 <9번째 파도>와 처음으로 조우하게 된 것은 유학 첫 해, 러시아미술관을 견학할 때였다. 당시에는 새로운 러시아 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어 어떠한 인상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 이 그림에 대한 나의 솔직한 기억이다. 그러나 고국에 대한 향수와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 어느 날, 추위를 피하고자 러시아미술관을 다시 방문해 <9번째 파도> 앞에 다시 섰을 때, 설명할 수 없는 기분과 함께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30분쯤 그림 앞에 넋을 놓고 앉아 있었을 즈음 다시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힘든 일이 있거나 잘 안 풀리는 일이 있으면 러시아미술관의 <9번째 파도 > 앞에 앉아 흩어진 마음을 다잡곤 했다.

아이바좁스키는 바다를 화폭에 담아온 화가로 유명하다. 그 중 <9번째 파도>는 수많은 러시아 명화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으로 손꼽히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러시아에서 ‘9번째 파도’라는 표현은 거스를 수 없는 절대권력, 넘어설 수 없는 막강한 자연의 힘의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이는 반대로 아무리 나약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음을 모아 최선을 다한다면 ‘9번째 파도’와 같은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의미로도 사용한다. 

현재 한국에 돌아와 녹록지 않은 한국의 사회생활에 좌충우돌하며 적응하고 있다. 이제는 비행기를 타고 러시아로 가지 않는 이상 <9번째 파도>와 자주 마주할 수 없지만,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마치 <9번째 파도> 앞에 서 있는 상상을 해본다. 앞으로 사회인으로 살아가면서 절대로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어마어마한 ‘9번째 파도’를 만날 것이고, 내가 ‘9번째 파도’ 같은 기적 같은 힘을 발휘하여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 중에도 같은 상황을 직면한 경험이 있으리라 본다. 그럴 때마다 내가 나에게 그리고 독자분들께 하고 싶은 말은 “희망은 가장 마지막에 사라진다” 


- 양민아(1977- ) 서울대 체육교육과 한국무용전공 졸업,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 문화사회학 석·박사.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로 제27회 대구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 현 한국전통무용가, (사)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