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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나의 여성편력기

손수호

네페르티티


여자를 밝힌다는 사실을 공개한다는 게 께름칙하지만 타고난 성정이 그런 걸 어이하랴. 게다가 그 밝힘증이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장애-비장애를 넘어서며,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무시로 증세가 상당히 위중하다 하겠다. 내가 첫 번째로 사랑한 여인은 뜻밖에도 이집트 왕족이다. 그녀와의 만남이 20년을 헤아리는데도 지금껏 사진을 들추니, 거의 스토커 수준이라고 해야겠다. 운명적 사랑이라고 해서 만남 자체가 극적일 필요는 없다. 1990년대 후반,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취재를 끝낸 뒤 베를린으로 이동해 굳이 베를린신박물관에 들렀던 것이 실수였다고나 할까. 네페르티티. 이 여인을 처음 조우한 순간 나는 발이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그냥 14세기도 아니고, 기원전 14세기의 여인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나 침을 꼴깍 삼키며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눈, 코, 광대뼈 등 뚜렷한 이목구비에다 가늘고 긴 목은 미인의 기본. 무엇보다 저 유려한 얼굴 라인은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책상 위에서 나와 눈빛을 교환하는 그녀의 상아 조각을 보면 더러 연민의 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여왕, 왕비, 왕의 어머니까지 거론되는 복잡한 가계도를 보면 권력의 중심에서 얼마나 고생했겠나 싶어지는 것이다. 왼쪽 눈동자의 부재가 이미 범상치 않은 내력을 담고 있기에 고고학자들이 연구랍시고 더는 슬픈 과거를 들춰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지금의 그녀가 좋다는 말이다.


사모트라케의 니케


두 번째 여인은 사모트라케의 니케다. 애초에는 도판 속 여신상에 불과했으나 프랑스박물관연합에서 제작한 미니어처 복제품을 보면서 흠모의 정을 느꼈고, 마침내 루브르박물관에서 친견의 기회를 갖고서는 하염없는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내가 불경스럽게도 ‘여신’을 ‘여인’으로 부르는 것은 저 강건하고 풍성한 볼륨감 때문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뱃전에서 가슴을 당당하게 내민 채 앞발을 뻗어 내딛는 저 역동적인 포즈, 해풍에 휘감기는 옷자락의 주름, 복부와 둔부와 허벅지로 이어지는 저 탄력 있는 근육은 최고의 카리스마가 아닐 수 없다. 기원전 190년이라는 까마득한 시간을 더듬자면 깜박 현기증을 느낄 정도다. 1863년에 그리스 섬에서 발견될 당시 산산조각이 난 것을 이토록 눈부신 자태로 복원한 것은 전적으로 루브르박물관의 공로다. 학예사들은 다른 니케상을 비교한 결과 니케의 오른손에는 나팔, 왼손에는 지휘봉을 잡은 모습일 것으로 추정한다. 남은 것은 얼굴인데, 나는 더는 복원작업을 진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미인이 아니면 괴로울 것이고, 미인이면 만인과 나누어야 할 것이기에.


『단원풍속도첩』 중 우물가


세 번째 여인은 ‘우물가’의 새댁이다. 『단원풍속도첩』의 주인공인데, 이 야무진 여인의 매력은 볼수록 커진다. 우리 전통회화 속에 여인이 드문 데다, 널리 알려진 혜원의 <미인도>는 직업여성 특유의 분 냄새 나는 것이 싫다 보니 우물가의 이 여인을 가까이 두게 된다. 네페르티티를 흠모하고, 니케를 욕망한다면 이 새댁은 마루에서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대상이다. 조선의 여인 가운데 가장 반듯한 모습이라고 할까. 어떤 평자는 남녀 간에 모종의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외설의 차원으로 설명하지만 나는 유별의 거리감이 적절하게 유지된 상태라고 본다. 강단 있게 꼭 다문 입술, 중립지대에 시선을 던지는 균형감, 늙은 아낙들과 달리 단단히 중심을 잡고 선 저 자신감이 좋다. 나는 우물가의 새댁보다 매력적인 조선의 여인을 알지 못한다.



손수호(1958- ) 경희대 법대 및 동 대학원 졸업(언론학박사). 경향신문, 국민일보 문화부장, 부국장, 논설위원 역임. 『책을 만나러 가는 길』(1999),『문화의 풍경』(2010),『도시의 표정』(2013, 열화당) 저술. 현 인덕대 도시환경디자인과 교수, 한국저작권위원회 위원, 한국공예디자인진흥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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