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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미술인과 문학인의 교류와 영향

박영택

양주동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를 읽다 보니 식민지 시기의 문학인과 미술인의 신산한 삶에 대한 서글픔이 더욱 짙어졌다. 그 시절을 아득히 상상하면 형언하기 어려운 비애가 앞선다. 예술에 대한 열정과 재능으로 넘치던 여러 천재가 대부분 가난과 폭음, 자학으로 자진하듯 가볍게 제 삶을 거두고 사라진 자리를 안타깝게 되짚어 본다. 그들의 생몰연대를 확인하는 일은 버릇 같고 그때마다 짧은 탄식을 동반하면서 내 나이의 지루함과 너무나 조숙했던 이들의 찰나 같은 삶에서 이룬 놀라운 성취 사이에서 잠시 시름에 잠긴다. 부족하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그들은 무엇을 열망하고 이루고 이내 가버렸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본다. 고유섭, 김기림, 김복진, 김소월, 김용준, 김종태, 김중현, 윤동주, 이상, 이인성, 이중섭, 정지용 또 누구누구…

너무 이른 나이에 죽은 이, 불우한 환경에서 힘겹게 살다 간 이, 식민지 치하의 여러 질곡에서도 예술을 사랑하고 자기 재능을 펼치다 차마 스러진 존재들. 나는 당시 그들이 읽은 책과 받은 교육과 지적인 수준에 놀라곤 한다. 그 시절은 결코 옛날이 아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광범위한 지적 편력과 열정을 지녔고 뛰어난 재능을 갖춘 이들이다. 그래서 식민지 시기에 발표된 서글픈 시를 찾아 읽는다. 김소월과 정지용과 백석, 윤동주와 이육사, 서정주… 그리고 시집의 장정과 삽화를 그린 이의 그림도 함께 본다. 김환기와 정현웅, 김용준과 이상범, 길진섭과 이인성… 동시에 그 시절 문학인과 미술인의 깊은 교류와 연대, 교류와 자극을 떠올린다. 화가는 시적 정신을 그림에 담고자 했고 문학인은 시에서 이미지를 추구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풍요로운 문학과 미술의 만남으로 기억될 만하다. 특히 30년대 『문장』지의 이태준과 김용준, 그리고 김환기의 유대와 활약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나는 어린 시절 『현대문학』 잡지의 표지화를 통해 그림에 눈을 뜬 것 같다. 당시 최고의 미술인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책 표지는 유년기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책에 실린 시와 소설, 그리고 삽화 등은 하여간 엄청난 자극을 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강일, 고유섭- 경인팔경도, 2023, 한지 위에 안료, 60×90cm


문학은, 시는 보지 못하는 그림에 해당하고 미술은 무언의 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시와 그림이 그렇게 분리되어 있거나 상이한 영역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시를 문자로만 읽지 말고 그림처럼 형상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고 그림에서 문학적인 서사를 기대하는 것도 무방하다. 문인과 시각 이미지를 다루는 작가가 함께 예술 공동체를 이루고 문자와 이미지를 섞고 문학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창안해 둔, 혼종적이고 융합적인 텍스트를 만들어보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그런 시도가 꾸준히 진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미술에 와서 미술의 문학적 요소는 의도적으로 배제되었고 그로 인해 미술과 문학의 만남이나 서로 간의 영향력은 이전과는 달라졌다. 오늘날 각 장르는 각기 날카롭게 분화되고 만남과 자극은 거의 없고 교류 역시 희박하다. 미술 작품에서 깊고 넉넉한 인문학적 소양이나 문학적인 뉘앙스를 찾기도 힘들다.
그런 것을 품고, 이를 자연스레 작품 안에서 방사하는 이는 이제 거의 없다. 지극히 건조하거나 기계적이거나 너무 얇은 그림이 피상적인 것을 실어 나른다고 힘겨워한다. 동일한 것을 반복해서 꾸미거나 유사한 것을 대량 생산한다. 이 가볍기 그지없는 키치와 유사 디자인의 홍수 속에서 작가는 질이 떨어지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바보 같은 장인이 되어 간다.
그리고 그런 것이 아트상품 내지 아트테크라는 이름으로 팔리고 수집된다. 이를 조장하는 ‘전문가’가 컬렉터에게 그것을 추천하고 교육한다. 아트페어는 그러한 각축장이 되어 버렸다.

자본주의의 상품 경제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이 추이는 작가의 성품, 인문학적 결, 예술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에서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빛을 망실한 상태에서 그저 팔리는 상품이 되어버린 작금의 미술을 지시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식민지 시기의 문학인과 미술인의 격을 생각한다. 그들의 치열한 삶과 서로 간의 교류와 예술에 대한 열정을 우울하게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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