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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한강변의 타살’ 이후

변종필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역사를 몸으로 쓰다’(9.22-2018.1.21,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사진이 있다. 1968년 10월 17일 오후 4시. 서울의 제2 한강교 밑에서 펼친 집단 퍼포먼스 〈한강변의 타살〉이란 행위예술을 기록한 사진이다. 행위예술가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3명이 주축이 되어 몸에 비닐을 걸치고 그 위에 쓴 글을 읽고, 매장하거나 태우는 파격적 행위가 담겨있다. 그날 작가들이 타살한 적폐(화형식) 대상은 ‘문화 사기꾼(사이비 작가), 문화 보따리장수(정치 작가), 문화 기피자(관념론자), 문화 부정축재자(사이비 대가), 문화 실명자(문화 공포증자), 문화 곡예사(시대 편승자) 등이었다. 1968년 한국사회의 가짜 문화와 가짜 예술인을 ‘매장’하고 ‘타살’한다는 결의를 표출한 파격의 퍼포먼스는 49년이 흘렀지만, 그 결의가 여전히 유효하기에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강국진, 정강자, 장찬승, <한강변의 타살> 1968.10.17. 오후 4시 제2 한강교 밑 1968 디지털 프린트 가변크기,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숱한 시간 동안 미술계의 모순과 기성문화세력이 사라지지 않은 것은 왜일까?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필자는 ‘한국적 시스템 구축 실패’와 ‘예술본질에 대한 사유 부재’를 주된 원인으로 꼽는다. 1968년 이후 미술계도 개혁과 변화를 가질 수 있는 시기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미술계의 건강한 발전을 위한 마스터플랜이 없었다. 복지(창작&주거공간 제공), 구인/구직(전문가양성), 전시 등과 관련한 여러 정책과 제도가 논의되거나 실행되었지만, 그때그때 즉흥적이고 급한 불만 끄는 식의 대처에 급급했다. 세계미술의 중심역할을 하겠다는 포부나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용감한 실천이 부족했다. 예술인 복지정책은 내용이 부실한 형식뿐이고, 전문 인력 양성은 도대체 진전이 없다. 전시도 마찬가지다. 비엔날레나 아트페어처럼 짧은 주기로 유행에 편승하는 시스템을 모방하고 복제해 왔지만, 카셀도큐멘타나 뮌스터조각 프로젝트처럼 오랜 시간 공들여 예술의 본질과 역할을 반성하는 시스템은 도입하지 않았다. 이렇듯 근본적 해결방안 마련을 위한 연구나 실천보다는 유행에 편승해 일시적 효과를 내는 일만 반복되었다. 이는 각 단체, 혈연, 학연 등에 얽매인 연고주의, 특정 작가에 쏠리는 각종 혜택, 예술의 하향 평준화를 대중화로 눈속임하는 수준 미달의 전시, 정체성과 선정기준이 불투명한 공모전 등 우리 문화에 오랜 기간 뿌리내린 고질적 병폐 때문이다. 이로 인한 예술의 질과 대중의 미술 인식은 제자리에 맴돌 뿐 변혁을 끌어내지 못했다. 

‘예술본질의 사유 부재’는 정책 부재보다 미술인(예술작품생산자)의 책임이 더 크다. 예술의 본질에 관한 사유보다 개인의 성공과 출세에만 관심을 쏟는 이기적 행태에 익숙하고, 눈앞의 이익에 예술을 이용한 사람들에 현혹되어 예술의 본질이 흐려졌다. 부조리에 항거하기보다 자기검열을 강화하고 현실 안주를 택하며, 예술의 본질이 먹고사는 문제로 해결되는 것처럼 호도한다. 실제 화가의 생활고를 해결하는 몇몇 정책이 근본 해결처럼 공론화된 반면, 정작 예술의 본질과 역할에 관한 고민과 성찰의 공론화는 없다. 시대 담론이 사라지고, 비평이 죽었다는 진단도 같은 맥락이다. 49년 전, 미술계의 가짜를 향한 일갈은 이제 하나의 기록으로만 남고, 그들이 시도했던 ‘타살’은 미수에 그쳤다. 

요즘 미술계는 새 정부가 내건 적폐청산으로 문화예술계도 더 나아질 거란 기대와 희망이 부푼다. 그러나 지금 미술계에 필요한 것은 기대와 희망보다 반성과 실천이다. 썩은 환부를 과감히 도려내고 미술계의 건강회복을 위한 최선의 처방책 마련에 뜻과 힘을 모아야 한다. 미술의 질과 국민의 인식수준 향상도 결국 미술인의 몫이다. 이에 책임을 느끼고 미술계의 모순과 적폐, 인습적 사고를 깨뜨리는 일에 분투해야 한다. 

2018년이 건강한 미술계를 만드는 그 시작 해가 되었으면 한다.


- 변종필(1968- ) 경희대 미술교육과, 동 대학원 미술과 석사, 동 대학원 사학과 문학박사. 미술평론가협회 미술평론공모당선(2008),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 당선(2009), 『아트비하인드』 지음, 『단색화 미학을 말하다』, 『손상기의 삶과 예술』, 『한국현대미술가 100인』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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