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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블랙리스트 이후, 예술지원 원칙의 전환을 위하여

박소현

최근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수사와 대통령 탄핵 정국 속에서 방대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블랙리스트 사건은 정부가 주도적으로 헌법상의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 등을 침해하는 위법행위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블랙리스트에 한해서 보면, 그 방법은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말대로 ‘지원 배제’였다. ‘지원 배제’라고 거듭 명명한 속뜻은 검열이라는 혐의를 피해가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원 배제는 검열과 같이 예술가나 예술활동, 그리고 예술작품에 대해서 직접적인 통제와 폭력을 행사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이 기묘한 구분법은 예외적인 견해이거나 범법자의 자기변호를 위한 억지 논리에 그치지 않기에, 문제적이다.

세계적으로 볼 때, 지원 배제는 20세기 후반에 출현한 신종의 검열법이다. 비교적 가까운 역사적 기원을 들자면,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발흥 속에서 ‘작은 정부’를 내세운 공공부문의 예산 삭감과 효율성 우선주의가 이른바 ‘지원 배제’의 유용한 근거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으로는 ‘선택과 집중’의 원칙이 대표적이다. 일견 합리적으로 들리는 이 원칙은 그 자체만으로도 헌법의 ‘표현의 자유’를 위배하는 것이다. 누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선택’을 하든, 거기에는 ‘배제’가 동반될 수밖에 없다. 애초에 이 선택과 배제가 예술 외적 요인인 정부운영 방침(작은 정부)을 명분으로 삼음으로써, 그 방침이 대상을 가리지 않고 전면화하는 것을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혁신으로 간주함으로써, 예술지원은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상의 원리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 합리성을 가장한 원칙이 가장 강력한 선출권력인 대통령의 정치적 입장을 관철하는 수단으로 전락함으로써, 예술지원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문화전쟁의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실제로 이 효율적인 예술지원이 작동하는 방식은 ‘국민의 세금’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며 예술과 정치를 구분하는 것이었다. 얼마 전 구속된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국정감사 등에서 예술과 정치의 분리를 역설했고, 특검 수사과정에서 블랙리스트를 ‘주요 정책’이었다고까지 진술했다. 블랙리스트가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행정부의 정치적 입장과 ‘다른 정치’를 배제하는 논리이자 방법이라면, 정부가 예술과 정치를 구분하는 것이나, 이를 통해 ‘국민 세금’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것 모두 ‘중립적이지’ 않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중립적인’ 예술지원을 하자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예술지원이 합리성, 효율성, 객관성 등의 중립을 가장한 행정언어 아래서, 얼마나 극명하게 예술검열과 예술탄압의 온상이 되었는지를 직시하자는 것이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적 논법에 따라 ‘순수한’ 예술과 ‘불순한’(곧, 정치적인) 예술을 가르는 현실에는 미래도, 희망도 없다. 그리고 우리가 계속해서 예술의 ‘순수성’을 강제하며 예술지원의 원칙을 이러한 허구의 중립성에서 찾는 이상, 블랙리스트는 언제든지 또 ‘주요 정책’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블랙리스트 ‘이후’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큰 숙제가 던져진 셈이다. 그 숙제를 위해서는 블랙리스트를 가능하게 했던 이 예술지원의 원칙들, 논리들을 예술의 언어로, 또는 예술계 ‘내부의’ 언어로 분석하고 토론하며 기억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예술비평 내에서 ‘제도비평’ 또는 ‘정책비평’이라 할 수 있는 장르를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 언젠가부터 예술에 관한 가치판단과 미학적 논쟁들은 예술계 내부가 아니라 국회와 정부, 각종 지원기구, 심지어는 수사기관과 정보기관, 법정 등으로 자리를 옮겨 더 뜨겁게 전개되고 있는 듯하다. 심지어 예술지원이 첨예한 국정농단의 장이 되어버린 사태에 대해 분노하고 비판할 수 있는 근거는 헌법상의 ‘표현의 자유’와 ‘학문과 예술의 자유’ 외에는 찾기가 어렵다. 그 ‘표현의 자유’나 ‘학문과 예술의 자유’에 대한 해석도 예술의 언어로, 예술계 내부에서 이루어진 적은 마땅히 없는 듯하다. 블랙리스트는 정부주도의 예술지원이 예술계라는 당사자를 한없이 대상화하고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온 소산이기도 하다. 그러니 예술지원의 근본적인 전환을 위해서는 단순히 행정언어나 정책공학적인 접근을 넘어서야 한다. 예술계로부터의 ‘제도비평’ 또는 ‘정책비평’이 절실한 까닭이다.


- 박소현(1973- )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석사, 도쿄대학 문화자원학과(문화경영전공) 박사.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문화예술연구실 부연구위원 역임. 현 서울과학기술대 IT정책대학원 디지털문화정책전공 교수. 미술사 및 박물관/미술관학, 문화예술정책 관련 논문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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