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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지금 여기서 시작하는 아카이브

이지희

전문직 연수 프로그램 전경


192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외무장관 슈트레제만(Gustav STRESEMANN, 1878-1929). 그가 사망하자 슈트레제만의 충실한 비서였던 베른하르트는 그가 재직했던 6년 동안 남긴 300상자 분량의 서류, 문서, 서신 등을 선별해 3년 후 『슈트레제만의 유산(Gustav Stresemann Vermächtnis)』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책은 출간 직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붕괴하고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면서 거의 배포되지 못하다가 3년 후 영국의 번역가 서튼이 2/3분량의 선집으로 번역해 영미권 학자들에게 소개되었다. 슈트레제만이 남긴 문서더미는 1945년 미국과 영국 정부의 수중에 들어갔고, 두 정부는 그 전체를 사진으로 찍어 워싱턴과 런던의 문서 보관소에 비치해 학자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 후 베른하르트의 책이 슈트레제만의 서방정책을 중심으로 한 다수의 자료와 동방정책에 대한 자료 일부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서튼의 책에서는 영국의 입장에서 중요하지 않은 동방정책에 대한 자료가 거의 삭제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유럽 현대사에서 슈트레제만이 소련의 대사와 벌인 수백 차례 회담의 의미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이런 사실은 아카이브 300상자가 아니었다면 절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굳이 『역사란 무엇인가』에 인용되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언급하는 건, 여기에 아카이브의 중요성과 아키비스트의 역할에 대해 시사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슈트레제만의 아카이브는 그가 일을 하는 과정에서 생산하고 정리한 것이었고, 사후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해석을 바로잡는 기초가 되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그렇기에 발터 벤야민은 “과거는 인식 가능한 순간에 인식되지 않으면 영영 다시 볼 수 없게 사라지는 섬광 같은 이미지로서만 붙잡을 수 있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카이브 300상자는 섬광 보다 오래 빛나는,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리적 실체이다. 그리고 이 말에서 더 중요한 건 인식 가능한 순간에 인식할 수 있도록 남기지 않으면 과거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여기에 아키비스트의 역할이 있다. 역사가들이 누군가 잊는 사실을 전문적으로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아키비스트는 물리적 실체로서 현재를 기록하고 수집하는 사람이다. 전자가 사건에 대해 해석한다면, 후자는 열린 해석과 창조로 이어지는 통로를 닦는다.

“왜 아카이브일까요?”,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시간과 예산을 들여 아카이브를 하려고 하세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한 미술계 종사자들에게 물었다. 간단한 발표가 끝난 후 자리에 모인 30여 명의 참여자들과 토론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문화적 성숙도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현재를 기록해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단계에 들어섰음에 동의했다. 이어진 토론에서는 참여자들이 미술계에서 일하고 있는 만큼 아카이브에 대한 실질적 고민과 방향에 대한 유효한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 상당수는 미술관에 쌓여 있는 전시관련 문서와 인쇄물, 영상 등을 어떻게 분류하고 관리하면 좋을지에 대한 것이었고, 나머지는 작품과 아카이브의 경계, 미디어 자료의 보존 문제, 디지털 매체로 인한 자료의 생산환경 변화 등에 대한 것이었다. 이 때 가장 많이 한 답변은 기록물을 관리한다는 점에서 물론 보편적인 방법과 지침은 있지만, 기관의 정체성과 보유한 아카이브에 대한 고려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대규모 컬렉션을 관리하는 방법과 절차를 소규모 기관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는 없다. 5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기관자료의 이관과 작가들의 기증을 통한 아카이브의 수집 절차나 전산프로그램 구축, 수장고 건설, 디지털화에 드는 막대한 예산과 안정적 인력, 고유한 업무 기능을 수행할 여건을 갖춘 곳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한 건 일단 시작하는 것이다. 가장 최근의 과거에서부터 아카이브를 주제나 연도별로 분류해 질서를 파악하고, 간단한 목록을 만드는 것, 그렇게 인식할 수 있는 순간에 인식 가능하도록 아카이브를 통제하는 것에서 쉽게 시작할 수 있다. 당장 컴퓨터를 켜고 ‘2016’이라는 제목의 새폴더를 만들어 지난 한 해 동안 한 일들을 모아 보는 건 어떨까? 아니면 튼튼한 종이상자 몇 개에 ‘2016 전시자료’라고 써 놓고 아카이브를 유형별로 분류해 보는 것도 좋겠다.


- 이지희(1982- ) 성신여대 국문과 졸업, 서울대 미술이론전공 석사, 박사과정 재학중. 서울대미술관, 김종영미술관 근무. 현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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