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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대안공간, 어떤 오래된 미래

민병직

카타기리 아츠노부, 희생 미래에 바치는 재생의 이케바나, 대안공간루프, 2016


어느덧 십수 년, 이제는 이름조차 퇴색해 버린 대안공간을 말한다는 것이 그다지 많은 의미는 없어 보이지만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현재형으로 진행되는 것이라면 이제는 좀 더 허심탄회하게 혹은 다른 방식으로 말하기 위한 시도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뒤늦게 짧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에 대한 몇몇 소회를 피력해보고자 한다.

기존 미술 시스템, 구동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무언가를 위한 시도는 늘 펼쳐져야 하겠지만 사실 이러한 시간, 공간적 실험을 두고 대안의 그것이라 말하지는 않는 것을 보면, 대안공간 역시 이제는 어느 정도 역사화 된 자장 속으로 물러선 느낌을 받는다. 대안이 현재 진행형의 미래를 향한 부단한 모색 같은 것이라 말하면서도 이러한 선언적인 정의에서조차 오래된 느낌을 떠올리게 된다. 더구나 처음 출발했을 때의 갖가지 어려움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 없이 힘겹게 존속해 온 현실 대안공간이라면 그 오랜 역사의 두께만큼이나 많은 문제점이 누적되었던 것이고 이에 대한 피로도 역시 가중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달라졌을지언정 여전히 현실의 흐름으로 자리하고 또 이러한 흐름이 오래된 미래로 지속될 수 있다면 그 또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판단했다. 대안공간에 대한 개념적인 정의나 이미지와는 상관없는 현재의 지형 속에서 달라진 역할과 위상 변화 등을 고민했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래된 익숙한 무엇으로, 유연하고 여유로운 운신의 폭 같은 것들이 현실 대안공간에서 필요한 미덕쯤으로 여긴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저 낯설고 새로운 실험과 시도만을 펼치는 공간이 아니라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간극들을 메꾸고 채우는 역할이나 기존 미술의 역사를 (재)맥락화 시키는 시도, 동시대 미술의 서로 다른 세대를 묶는 어떤 허리 같은 모습들을 떠올리려했다. 대안공간의 개념들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노력, 이를테면 의외의 것들, 오래된 것들, 이질적이고 다양한 것들을 동시대적인 것들과 덧붙이거나 섞고, 이 새로운 이접, 통접의 전술들로 기존 미술의 흐름을 낯설거나 익숙하게 하는 것들이야말로 현실 대안공간의 어떤 소임이 아닐까 생각한 것인데,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현실적인 한계나 제약들, 그리고 그만큼 둔탁해진 시스템, 운영상의 관성들이 여전히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지지 않는 현실의 어려움은 생각 이상으로 견고했고 그동안의 갖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운영의 벽은 그 두터운 존재감만을 확인하게 했다. 사실, 어떤 면에서 대안의 개념적인 설정이나 모색만큼이나 현실적인 운영 시스템과 조건의 대안을 위한 노력에 많은 할애를 하지 못한 것도 얼마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너무나 대안(對案)적이었고 또 그만큼 너무 대안(代案)적이지 못해 이제는 대안이라는 레테르조차 일정한 역사적 한계를 지닌 개념으로 별다른 현실적인 함의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뒤늦은 후회치고는 현실 공간으로서의 역할이나 유용성 등은 달라진 지반 속에서도 여전히 작동할 수 있기에 세간의 편한 이야기들처럼 이를 그저 쉽게 단념하고 포기할 문제만은 아닌 듯하다. 다만 기존의 상투적이고 관행적인, 혹은 당위적인 모습들만으로는 그 오래된 미래를 이어갈 수 없음은 꽤나 자명해 보인다. 그리고 모순형용 같기만 한 스스로의 개념규정에 발목을 잡힐 이유도 없을 것이다. 역사화 된 대안공간의 흐름은 그저 역사의 한 흐름일 뿐 이러한 과거의 궤적들 자체가 대안공간이 당면해야 할 동시대성이나 현실의 미래를 만드는 법은 아닐 테니 말이다. 대안공간 또한 그렇게 현실의 동시대성에 대한 다른 고민이 요청되는바,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말처럼 동시대성이 거리를 두면서도 들러붙음으로써 자신의 시대와 맺는 독특한 관계이고, 이러한 긴급함, 반 시대성, 시대착오 덕분에 우리는 ‘너무 늦은’ 형태이자 ‘너무 이른’ 형태로, ‘아직 아닌’ 형태이자 ‘이미’의 형태로 우리의 시대를 포착할 수 있다면 이들 동시대성에 대한 논의 같은 것들이 대안공간의 현실적인 접근에 있어 어떤 시사점을 주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러한 시차(時差, 視差)적인 인식이야말로 이미 너무도 익숙해져 굳어버린 대안공간을 뒤늦게나마 달리 볼 수 있는 한 방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술 시스템의 한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대안공간의 오래된 미래를 위한 현실적인 접근이 아닌가 싶다. 이제는 신화화된, 특정한 개념들에 사로잡힌 어떤 시·공간의 이미지들을 애써 떠올리려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 민병직(1970- ) 고려대 철학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석사. 아트선재센터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일민미술관 큐레이터, 대림미술관 학예팀장, 제1회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 기획팀장·특별전 큐레이터, 서울시도시갤러리프로젝트 책임큐레이터,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문화역서울284 전시감독, 대안공간루프 바이스 디렉터, 협력 디렉터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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