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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이제야 비로소, 위기

황록주

우리 미술계가 연일 위기라 말한다. 일단 미술시장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한다. 위기를 논할 때, 역시 자본은 힘이 세다. 시장의 위기에도 몇 가지 갈래가 있다. 일단 시장 규모 자체가 극소로 축소된 상황을 위기라 하기도 하고, 일부 대형 화랑이나 옥션이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을 위기로 진단하기도 한다. 그나마도 소규모 시장에 저급하고 조악한 작품들이 대중을 향해 쏟아지는 현상이나, 그래서 작품다운 작품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을 위기라 하기도 한다. 한국 미술이 무엇인가 물으면, 딱히 답할 것이 없는 정체성의 부재 또한 위기론을 한 몫 거든다. 어떤 시선으로 보는가에 따라 위기의 모습이 참 다양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 위기의 상황에도 우리나라에서는 3대 비엔날레, 이웃나라 중국에서 상하이비엔날레가 올가을 대형 미술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지자체 공립미술관 등 우리나라의 150여 개 미술관은 물론, 수많은 갤러리와 대안공간을 비롯한 신생독립공간에서는 어김없이 미술작품들을 선보일 것이며, 이 전시를 관람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이러한 미술품의 향유 활동은 작품과 관람권의 구입과 판매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다반사다. 문화의 공유와 확산, 교육과 같은 목표를 갖고 공공의 영역이 개입하는 것은 물론, 상업적 이득과는 상관없이 문화 활동에 헌신하는 개인과 사회공헌이나 마케팅 차원에서 기업이 투여하는 자원에 이르기까지, 시장 자본의 반응이 없는 활동은 가차 없이 사라지고 마는 단순한 경제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생산과 소비의 시스템이 이미 미술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미술시장의 형편이 좋았던 적이 있었던가? 2000년대 후반 잠시 미술품 투자와 함께 불었던 열풍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아주 일시적인 현상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미술시장은 반 고흐의 시절에도, 박수근과 이중섭의 시절에도, 특별히 ‘판매’할 것이 없는 실험미술의 전성기에도 힘들긴 매한가지였다. 앞다투어 위기라 말하는 요즘도 미술시장의 상황만 보자면 그 시절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미술을 둘러싼 변화된 자본 순환의 시스템과 더불어 미술과 관련한 이들의 태도는 분명히 다양해졌다. 비평가 아서 단토(Arthur C. DANTO)가 ‘예술의 종말’을 선언하고, 거대한 미술사의 내러티브가 아닌 예술작품 각자의 목소리를 근거로 하는 다원주의 미술을 옹호한 것처럼, 이제 우리도 우리 사회가 가진 내적 동인에 근거하여 미술을 대하는 시선의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 최근의 작품들은 회화, 조각, 설치, 사진, 영상, 미디어와 같은 장르 구분법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합적이다. 전통적으로 공예와 디자인, 건축으로 분류했던 영역들도 다 함께 미술의 맥락에서 읽히기 시작했고, 필자가 근무하는 미술관을 비롯한 여러 미술관에서도 기존과는 달리 영역을 불문한 이들의 활동 전반을 커다란 미술의 범주에서 파악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최근의 미술은 비좁은 미술시장만을 활동영역으로 삼지 않으며, 또한 전통적으로 고급예술이 지향했던 철학적 이해와 미학적 완성도에만 호소하지도 않는다. 미술은 디자인 영역을 통해 삶의 작고 미세한 부분까지 닿아 있으며, 마을 공동체, 도시의 재생, 자원의 재분배, 환경 보호 등, 전 세계가 화두로 삼고 있는 여러 현장에도 관여하고 있다. 물론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을 가르고 철저히 배제했던 모더니즘 미술 또한 여전히 많은 이들의 취향으로 존재한다. 이제 더는 이전의 예술은 예술이 아니고 총체적으로 다른 예술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언하기보다는, 그를 포함한 더욱 다양한 형태의 미술이 존재하게 된 것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문제는 미술시장이나 작품 부재가 아니다. 우리 미술이 겪고 있는 위기는 어쩌면 서구미술의 역사와 후기 자본주의 시대를 좇아온 우리 사회가 이제야 비로소 서구의 담론이 아닌, 우리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이러한 변화를 맞게 되었다는 즐거운 사실에 대하여 건강하게 논의할 담론의 터를 마련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또한, 이 위기는 디지털 문화를 기반으로 성장하여 순수미술 교육을 받은 이들부터, 디자인·건축·무용·음악 등 인접 예술 분야를 전공한 이들은 물론, 철학·경제·물리·IT 전문가에 이르기까지 출처와 분야가 다양한 이들이 서로의 정보와 재능을 한데 모아 다시금 르네상스적 예술 활동을 하는 이 시대의 우리 예술가들을 인류학적 시각에서 견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현장은 비평보다 늘 앞선다. 섣불리 위기에 몸을 움츠리지 말자. 비로소 찾아온 진정한 위기가 나는 오히려 참 기쁘다.


- 황록주(1977- ) 홍익대 예술학과 및 동 대학원 석사, 고려대 영상문화학협동과정 박사 수료.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2003-07). 경기도지사 표창(2009), 문광부장관 표창(2016) 등 수상. 현재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사(2007- ), 한국미술평론가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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