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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열매 없는 목적 설정-창작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오해

이희영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의 문화재단은 이달 들어 그들이 운영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입주할 미술가들의 명단을 줄줄이 발표한다. 수십 대 일의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이름을 올린 미술가는 성공한 예술가로서 갖추어야 할 반듯한 경력 중 하나를 확보하게 된다. 반면 그렇지 못한 이는 자신의 미술이 여전히 외면당한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맛보게 된다. 그 명단에 포함되지 못한 미술가는 기업이나 화랑이 운영하는 민간 레지던시의 선택을 막연히 기다리든지 아니면 보따리를 싸들고 해외 레지던시라도 나가야 할 판이다. 


이제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어느덧 미술계의 예기치 못한 힘으로 다가왔다. 17년 전 파주에 한 개인이 미술가들에게 제작 공간을 무상으로 제공한 것에서 그리고 1997년 문예진흥원이 강화와 논산의 폐교를 미술창작실로 활용한 것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다. 이후 쌈지창작스튜디오나 경안창작스튜디오와 같은 민간 레지던시를 비롯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운영하는 창동스튜디오와 같은 공공 레지던시가 속속 생겨났다. 2000년대 중반의 호경기에는 지방의 공공기관들이 앞 다투어 이 프로그램을 설계하거나 실행했다. 레지던시프로그램의 양적 증가에도 불구하고 최근 그것에 대한 미술가의 선망은 갈수록 훨씬 더 늘어간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운영하는 난지창작미술스튜디오의 설립취지를 보면 “발전 가능성 있는 신진들에게” 안정된 환경의 공간을 주어 그들이 “서로 교류하는” 창작환경을 조성하고 “한국의 미술계를 선도”할 차세대의 산실이 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힌다. 이는 얼핏 미술대학의 실기교육의 목표와 비슷해 보인다. 미술가들에게 무엇인가 제공(혹은 지원)해서 그들을 키우겠다는 것이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상당수가 이와 유사한 설립목적들을 밝힌다. 이는 또한 미술가들을 선별해 그들에게 특정의 혜택을 주겠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이 목적의 핵심은 투여(Input)해서 생산(Output)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레지던시는 전문성이 지역에 발휘되어야 하는 곳이다. 이 목적대로라면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미술가가 그곳에 들어가면 변화하고 성장해서 나올 것이고 좋은 무엇인가를 막연히 그에게 제공받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전문적 미술가로서의 사회적 기여나 역할이 죄다 무시되고 그곳에서 미술가가 기여하고 수행해야 할 최소한의 사회적 의무마저 찾을 수 없다. 그래서 그곳에 선택되려고 다들 아우성이다. 레지던시에 선택되는 심의의 상당수는 최근 미술의 시류나 트렌드에 맞춰진다. 그래서 스튜디오의 문을 열면 죄다 현대미술 일색이다. 해안지역의 스튜디오에는 당연히 있을 법한 물고기 화가가 없고 난지스튜디오에는 난지도를 대리할 화가가 없다.


미술가의 거주와 창작활동을 기반으로 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그것을 통해 지역의 환경과 시민을 새롭게 하는 문화적 열매가 기대된다. 그것은 투여해서 생산하는 곳이거나 아무런 기여 없이 혜택을 누리는 곳이 아니다. 투여해서 생산되는 미술로 선택된 미술가가 혜택을 누리는 곳은 평양만수대창작사정도일 것이다. 레시던시 프로그램은 미술가에게 제작의 기회만을 주는 곳이기보다 오히려 그 제작을 통해 지역에 기여할 기회를 주는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에게 향유와 창작의 기회를 목적으로 하는 서울문화재단의 서울시창작공간과 예술가의 지역공헌도를 제고하려는 인천문화재단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눈에 띤다. 서울시창작공간은 예술 장르의 특화와 지역성의 결합을 시도해왔고 인천문화재단은 다양한 장르를 한 곳에 모으는 실천을 해왔다.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여전히 기여하는 미술가이보다 선택된 미술가를 생산한다. 목적의 오해로 그 곳에 참여한 모든 미술가들이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미술가들의 창의적이고 전문적인 영향력이 경력 쌓기에 소모되기보다 공공의 기여를 통해 더 확대될 실증적 정책을 바란다. 그를 위해 그 목적의 핵심이 “투여와 생산”의 논리에서 오히려 다양한 장르, 다양한 계층, 다양한 역할의 충돌(Collision)을 허용하는 논리에서 출발했으면 한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훈련 받아야 할 미술가를 성장시키는 학교가 아니라 충분히 훈련된 미술가들이 충돌하고 그 활력으로 그들의 전문성을 지역에 발휘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희영(1965-) 서울대 서양화과 석사. 서초조형예술원 학예교육실장 역임. 현 아트네시각매체 학예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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