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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콘텐츠 VS 컨텍스트 그리고 문화경쟁력

이대형

모든 연구에는 그에 앞서 충분한 리서치가 요구된다. 리서치가 이론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많은 리서치가 생산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실전에서 새로운 액션을 이끌어 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 같은 리서치와 실행의 괴리감은 특히 현대 시각예술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유는 리서치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 목적과 방식이 처음부터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한 가지를 뽑으라면, 빠른 시간에 안전하게 성과를 도출해 내야 한다는 각 지자체의 강박관념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새로운 모델을 창조하는 대신 해외의 성공사례를 한국적인 상황에 얼마나 신속하게 들여오는가의 경쟁이 계속 되었던 지난 20년은 ‘문화사대주의’의 연속이었다.


예를 들어, 수많은 비엔날레가 있지만 사람들은 베니스비엔날레(Venice Biennale)를 이야기하고, 도큐멘타하면 카셀을 떠올린다. 아트페어는 아트바젤(Art Basel)을, 미술상하면 터너프라이즈(Turner Prize)를, 현대미술관하면 뉴욕 모마(Moma)와 런던의 테이트(Tate)를 말한다. 이는 올림픽하면 종주국인 아테네를 떠올리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아시아의 많은 도시가 있지만 근대화 이후 건축·디자인·미술 분야에 있어 눈에 띄게 경쟁력있는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해외에서 성공한 ‘검증된’ 흥행카드의 아시아식, 혹은 한국식 버전을 생산해 온 서울·광주·부산 역시 이 같은 오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건축과 디자인, 미술이야 말로 한 도시의 문화·관광 경쟁력을 좌우하는 척도라는 점이다. 그래서 지금도 수많은 아시아의 도시에서는 성공한 다른 도시의 모델들을 벤치마킹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뉴욕·런던·파리 등의 문화경쟁력은 차별화된 프로그램을 남들보다 앞서서 시작했기 때문이지 결코 그들의 콘텐츠가 우리보다 훨씬 뛰어나서만은 아니다. 먼저 깃발을 꽂았다는 순발력과 거기서 축적된 역사가 그들의 오늘을 만든 것이다. 더 이상 ‘Super fast follow’식의 후진적인 방법론으로는 그들의 브랜드 밸류를 따라 잡을 수 없다. 새로운 시스템을 가지고 최고의 콘텐츠를 끌어들이고 그 안에서, 전혀 새로운 트래픽이 일어 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뉴욕 모마·런던 테이트·아트바젤·베니스비엔날레 같은 기존의 시스템을 넘어서기 위한 플랫폼 전략은 무엇이 있을까? 각 도시와 지자체는 최고의 콘텐츠를 끌어들이거나 만들기 위한 무한 경쟁에 돌입했다. 이를 위해 막대한 예산을 들여 전시를 만든다든지, 미술관을 짓는다든지, 비엔날레를 도입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콘텐츠보다 컨텍스트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이제 한국도 모방이 아닌 창조를 해야 할 때이다

여기 눈 앞에 크롬 도금된 잘빠진 문 손잡이가 있다. 이 손잡이가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은 그 손잡이가 어떤 문에 달려 있는가가 결정해 줄 것이다. 또한 그 문이 좋은 문인가는 어떤 벽에 달려 있는가가 결정해줄 것이고, 또 그 벽은 어떤 집에 달려 있는 벽인가가 결정해 줄 것이다. 또한 그 집은 어떤 도시에 속해 있는가가 그 집의 적절성을 평가해 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우리가 고민할 것은 문에 달린 손잡이이다. 이 손잡이를 얼마나 잘 만들어 내는가가 승자를 갈려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손잡이만을 생각하고 손잡이 디자인을 하는 사람과 문을 보고 손잡이를 디자인하는 사람, 벽까지 보며 손잡이를 디자인하는 사람, 벽을 넘어 집을 생각하고 손잡이를 만드는 사람, 더 크게는 도시를 생각하며 손잡이를 만드는 사람과의 경쟁력에는 큰 차이가 있다. 도시까지 고민하며 손잡이를 만드는 사람은 비록 처음에는 진도가 느리겠으나 그는 도시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코드를 이해하고 전망하고 손잡이를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행동방식과 움직임을 계산하고 그들을 자신의 손잡이까지 유인하는 방법을 알게된다. 경쟁력있는 콘텐츠를 위해 컨텍스트까지 만들어 내야 하는 이유다.


컨텍스트는 콘텐츠에 다양한 의미망과 네트워크, 접근경로가 붙어 있는 무정형의 시스템을 의미한다. 문화강국을 위한 다양한 마케팅 활동이 콘텐츠 생산에만 제한되지 않고 더 넓게 새로운 컨텍스트를 고민하는 큰 시야를 확보하는데도 투자되어야 한다. 가장 초보적인 전략이 어떤 상품, 어떤 콘텐츠를 생산할까에 대한 고민이다. 물론 이것이 가장 근원적인 부분이겠으나, 이를 넘어 내 상품이, 내 전시가, 내 미술관이, 내 도시가 어떤 새로운 네트워크·접근경로·의미망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경쟁력있는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다. 또한 경쟁력있는 새로운 컨텍스트가 보다 다양한 네트워크와 의미망 그리고 접근 경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융합에 능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한 프로젝트가 여러 기관들을 돌아 다니며 결제를 받아야하는 후진적인 구조를 지양하고 한 프로젝트 아래 다양한 장르의 전문가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야 한다. 얼마나 독창적인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느냐가 한 도시의 한 국가의 문화경쟁력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더 이상의 ‘문화사대주의’와 ‘사일로효과’는 안된다. 도시를 보며 문 손잡이를 디자인하듯이, 저 멀리, 사람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경쟁력있는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



- 이대형(1974- ) 컬럼비아대 대학원 큐레이터 석사. 파이낸셜뉴스 칼럼니스트 역임. 현 독립큐레이터, HZONE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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