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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한 큐레이터의 죽음은 정녕 남의 일이었나?

장동광

한 큐레이터의 죽음은 정녕 남의 일이었나?

_이원일 큐레이터의 갑작스런 죽음을 추모하며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은 현대미술의 전위적 미래를 온몸으로 실천하고서 1968년 10월 프랑스 루엥에 고요히 묻혔다. 그의 무덤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어쨌든, 죽음은 항상 남의 일이다.(D'ailleurs, c'est toujours les autres qui meurent.)” 지구의 예술적 유랑자, 예술전투기 조종사로 자임하며 한국 큐레이터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각인시켜왔던 이원일 큐레이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떴다. 향년 51세, 아직 젊은 나이다. 직접적인 사망원인은 심장마비라고 한다. 이 비보를 접하고 근래 연락을 못하고 지내왔던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한동안 흰 눈발이 휘날리는 회색빛 하늘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가 죽다니! 나는 믿을 수 없는 이 사실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개인적으로 1996년도 일민미술관 큐레이터로 재직하던 시절부터 광화문 지척에 있는 성곡미술관에 그가 수석큐레이터로 근무한 탓에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나이도 동년배여서 심정적으로 가까웠던 탓도 있지만, 직업적 동료이자 사심을 나눌 수 있는 친구였고, 같은 큐레이터로서 현대미술에 관한 큐레이팅적 담론을 논할 수 있는 학형이기도 했다.


그가 이 세상과 하직하는 의식의 시작과 끝을 지키면서 그의 부인으로부터 들은 이원일 선생의 근황은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었다.“왜 전화라도 자주 해주시지 그랬냐?”는 부인의 하소연은 나의 가슴 속에 가라앉아 있었던 모든 슬픔의 밑바닥을 헤집어 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제 미망인이 되어버린 부인의 이야기를 종합하자면, 그의 직접적인 사인은 심장마비였지만 국내 미술계로부터 받았던 비판과 루머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간접적인 사유였다는 사실의 증언이었다. 그는 최근 심장에 이상 징후가 있어서 병원 예약까지 해둔 상태였고, 극도로 예민해진 그의 신경 탓에 부인과 두 딸들 모두가 매일 잠을 못 이루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원은 결국 그를 둘러싼 최근 10년간의 행보와 관련한 여러 가지 잡음들과 미해결 문제들, 개인적인 루머의 고착화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멀게는 2006년 상하이비엔날레의 도록 서문에 대한 표절문제 제기, 2007년 세비야비엔날레의 작품운송비 문제로 인한 보관창고에 한국작가들 작품유류(遺留) 문제, 가깝게는 2009년 MoMA P.S.1의 초빙큐레이터로서 전시추진 어려움에의 봉착건 등이 겹치면서 자존심이 강했던 그로서는 의사의 약물과다 복용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약을 먹어야 안정을 취할 수 있을 정도의 상태로 지내왔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이원일 큐레이터를 둘러싼 여러 가지 정황들을 종합할 때, 그가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특히 '2002 미디어시티서울'때 부터 저예산으로 무리하게 전시를 기획하면서, 그의 불도저식 추진에 작가들, 전시협력자들이 무척 당황스러워했다는 후일담을 여러 경로를 통해 들은 바 있었다. 이러한 무리한 행보와 연이은 과욕적 국제미술계의 입성에 대한 국내 미술계의 비판과 걱정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큐레이터로서 그는 한국미술과 아시아미술의 미래를 세계를 향해 짊어지고 나가고자 했다. 마치 시지프스처럼. 그는 자신의 돈으로 전시추진을 위한 사전 진행비를 감당해야 했고, 때로는 결산단계에서 남겨진 부족분을 막아나가야 했던 것이다. 이로써 그는 연금도 붓지 않은 상태에서 경제적으로 너무나 힘든 상황의 유산만을 가족들에게 남겨두고 저 세상으로 떠났다. 이것이 독립큐레이터의 현실이다. 


그러면 이 국제적으로 한국미술을, 아시아미술을 유럽중심의 주류미술계 속으로 끌고 들어가 담론의 한 축을 형성하고자 했던 그의 열망·노력·업적은 사라져야 하는 것일까? 장례식장에서 온 그의 대학선배이자 우리 업계의 1세대 되는 분은 큐레이터를 체계적으로 교육하기 위한 5년제 대학설립의 장밋빛 계획을 설파하고, 또 다른 한 분은 중국미술이 엄청나게 큰 규모로 성장하고 있다는 시장분석의 놀라운 지식을 털어놓고 돌아갔다. So What? 그래서? 차갑고 냉정한 언론비판의 화살을 맞으며, 미술계의 외면과 전시지원이 차단된 막막한 현실 속에서, 국제적 큐레이터로 발돋움하고자 그렇게 불철주야 새로운 기획 프로젝트의 성사에 매달리며, 미해결 과제들을 혼자서 해결하고자 애쓰다 죽어간 이원일 큐레이터가 다시 살아 돌아오길 바란다는 것인가? 그래서, 불란서적 지성을 발휘하며 뒤샹이 묘비명에 새긴 말처럼, 죽음은 언제나 남의 일인지도 모른다. 정말 필자가 그를 대신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고인의 죽음을 통해서 큐레이터의 신분보장 정책은 물론 문화외교의 첨병에 서 있는 독립큐레이터의 국가적 지원이 얼마나 절실한 일인가를 이 사회가 자신의 일처럼 고민한다면, 국제적인 무대의 입성에서 중도좌절한 그도 저 하늘에서나마 기뻐할 것이라는 점이다. 삼가 고인이 이제는 이 세상의 고통을 내려놓고 우리들을 용서하고, 안식과 평안을 찾기를 빌 뿐이다.



장동광(1960- ) 서울대 서양화 석사. 일민미술관 학예연구실 수석큐레이터, 서울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역임. 현 한국큐레이터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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